지난 3일 밤에 벌어졌던 한국바둑리그 월드메르디앙과 한게임의 4강전 중 유창혁과 이정우의 경기에서 흔치 않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종반 끝내기 단계인데 워낙 형세가 미세해 반 집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이라 두 선수는 물론 검토실의 응원단들이 모두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TV 모니터에 비친 바둑판의 형태가 조금 달라졌다. 사이버오로 기보(사진 왼쪽)와 바둑TV 화면을 비교한 결과, 상변의 흑돌 한 개가 한 칸 오른쪽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두 선수가 막판 초읽기에 몰려 바둑에 열중하다, 그만 옷소매에 쓸려 바둑돌이 옆으로 밀려났던 것. 당시 두 대국자는 물론 TV 해설자도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10여 수가 지나갔는데 그 동안 검토실에서는 이의 처리 방법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당장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쪽에서는 "공식 대국 중 제3자는 절대로 개입해선 안 된다"며 스스로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토록 놔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와 관련, 한국기원 바둑 규칙 제4조(대국 분쟁) 1항에는 "돌이 대국 도중 밀렸을 경우, 원래의 곳으로 옮기고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옮길 수 없을 경우에 쌍방이 합의하면 대국을 진행한다. 합의하지 않으면 양자패가 된다"고 규정돼 있다. 따라서 두 선수가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하고 얼른 이를 바로 잡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두 선수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다는 것. 만일 이대로 바둑이 계속 진행된다면 흑(이정우)이 한 집 이상 손해다.
그래서 한게임 쪽에서는 바둑TV 측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졸라댔고 결국 담당 PD가 계시원에게 사인을 보내 돌을 원위치로 옮겨놓고 대국을 진행했다. 결국 유창혁이 반 집을 이겨서 이 사건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한국기원 규정집 중 '소속 기사에 대한 내규' 제8조에는 "기사는 공식 시합 및 각종 대회 시에 조언 또는 담합을 금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과는 조금 다른 경우지만 어쨌든 제3자가 대국에 개입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대국 중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어떠한 이의 제기도 오직 대국 당사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게 바둑계의 불문율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처럼 비록 같은 팀이라 하더라도 '바둑판 바깥'의 사람이, 제3자로 볼 수 있는 방송사 중계팀에 이의를 제기해서 처리한 일이 과연 규정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사실 이번 대국이 TV로 생중계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돌이 실수로 움직여졌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운 일반 대국실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현재 규정상으로는 설령 옆에 있던 관전자가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일체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다가 대국자들이 바로 잡으면 다행이고 모르면 모른 채로 지나갔을 것이다. 아니면 서로 자기가 맞다고 주장해서 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바둑이 그 동안 예도로 취급돼 따로 심판을 두지 않고 각종 분쟁 시 대국자간 합의를 원칙으로 삼아왔지만 점점 승부가 중시되는 상황에서 이 정도 대비만으로는 미흡하다. 앞으로 바둑이 본격적인 체육으로 자리잡으려면 보다 명확하고 자세한 경기 규칙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또 경기마다 심판을 두는 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봐야 할 때가 됐다.
박영철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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