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를 다룬 외화 '메멘토'가 몇 년 전 국내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전직 보험 수사관인 주인공은 아내가 강간 당한 뒤 살해되는 충격으로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몇 가지 남은 기억의 파편을 근거로 범인을 찾아 나서는 그는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모든 사항을 메모하며,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으로 남긴다. 반짝이는 상상력과 막판 극적 반전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영화다. 망각은 불편하면서도 편리하다. 악몽 같이 돌이키기 싫은 기억이나 슬픈 추억은 빨리 잊어버릴수록 마음이 편해진다.
● 금융위기 교훈 벌써 잊었나
가계 발(發) 금융위기론이 무성하다. 주택담보대출로 인해 가계대출이 급증했으나 대출금리가 오르고 집값은 곤두박질하는 바람에 자칫 금융위기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 가능성은 논외로 하자. 외환위기로 그 고생을 하고, 2002년 카드사태로 신용대란을 치르고도 또 다시 금융위기에 떨고 있는 우리 금융의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두 차례 금융위기에서 아무런 교훈도, 학습효과도 받지 못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과거 카드사태는 은행과 카드사들이 신용기관으로서 근본을 망각한 채 길거리에 좌판까지 벌여가며 카드를 뿌린 탓이다. 이번 가계대출 위기도 똑같다. 부동산 투기붐에 편승해 주택만 담보로 잡으면 무조건 대출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상환능력을 따질 필요도 없었고, 대출 심사는 말뿐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권은 신용 및 리스크 관리 능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다짐했지만, 영업행태는 여전히 '전당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신용을 남발한 덕분에 은행권은 사상최대 수익잔치를 이어가고 있다. 국민은행은 올 1ㆍ4분기에 순이익이 1조 1,825억원을 기록해 은행권 최초로 분기 순익 1조원 시대를 열었다. 전년동기 대비 47.3%나 급증했고, 삼성전자(1조5,990억원) 순이익에 근접한 규모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 하나은행도 마찬가지다.
의당 장사를 잘했다고 박수를 보내야 하지만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순익의 크기만큼 경쟁력이 높아졌다고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은행산업을 육성한다는 명분으로 대폭 올린 수수료 수입과 부동산투기에 무제한 실탄을 제공한 주택담보대출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 같은 결과가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해외펀드만 보더라도 그렇다. 은행과 증권사에 짭짤한 수입을 안겨주고 있지만, 실제 역할은 상품 중계가 고작이다. 상품설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막대한 수수료를 외국사에 제공해가며 끝전을 조금 챙길 뿐이다. 어느 지역이 유망하다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어 급조한 상품을 내놓는 바람에 부실의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 밥그릇 싸움에 잡힌 금융빅뱅
요즘 금융계는 밥그릇 싸움이 한창이다. 정부가 2008년 시행을 목표로 입법화를 추진중인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의 한 조항 때문이다. 은행처럼 증권사에도 지로, 송금, 카드결제 같은 소액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하자는 조항이다. 한국은행까지 나서 은행권 전체와 증권업계가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자통법 추진 자체가 무산될 위기를 맞고 있다.
자통법은 한국판 '금융 빅뱅'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존 질서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 간 업무장벽이 허물어지고, 투자대상도 주식과 채권에서 원유와 금과 같은 실물자산으로 대폭 확대된다. 한 정부 관리는 이 법이 "1986년 영국 금융시장 빅뱅에 10배의 위력을 가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급결제 시장을 차지하려는 업계 간 싸움에 법안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그야말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글로벌 금융의 리더가 되겠다고 외치고는 돌아서서는 비좁은 국내시장 싸움에 매몰되는 금융계는 정말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모양이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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