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폐업에 즈음하여
강 내과 병원 강형용 원장이 ‘병원 폐업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을 붙인 편지를 지인들에게 우송하자 장안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다.
‘인사드립니다. 복숭아꽃, 진달래꽃이 꽃망울을 잉태하는 계절, 색다른 인사를 하려니 저려오는 가슴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송충은 솔잎을 먹어야 제격이듯이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는 숙명적인 명제에 따라 이 곳 좁은 골목에 작은 장막을 지은 지 벌써 40년을 훌쩍 넘겼고 연치 또한 망구(望九)가 되었으니 덧없는 세월을 실감합니다.
아직은 환도뼈도 성하고 무릎도 별 탈 없으나 아이들의 끈질긴 성화에 못 이겨 병원 문을 닫으려 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청진기는 환자의 심장과 닿는 마음의 통로였나 봅니다. 잔잔한 정을 주고받으며 피차의 신뢰를 돈독하게 한 세월들이었기에 아쉬운 마음과 진한 추억들이 가슴을 짓누릅니다.
앞으로는 그동안 미뤄온 청답지유(靑畓之遊)도 하고 제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더 가까이 가렵니다. 모쪼록 댁내 평안하시고 두고두고 교신을 바랍니다.’
당장 강형용 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유당(柚堂)! 뭐 그따위 글을 써. 나 울었단 말야.” 강 원장보다 세 살 연장인 원로 시인 황금찬이다.
음악을 전공하는 6녀 강은수는 독일 브레멘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썼다.
‘40년 하고 몇 개월. 인생살이의 뜻을 세운 청년이 고희의 나이로 가는데 걸리는 시간. 나의 2세가 나서 다시 결혼하여 그의 2세를 만드는데 걸리고도 남는 시간. 여기 40년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병원이 있다.
을지로 6가 강 내과를 아시나요? 원장 강형용 박사. 이 병원은 그 크기가 작기로 서울 장안 제일이고 소박하기로 으뜸이며 원장실에 놓인 책상은 골동품으로 병원을 열었던 그 날 이후로 아직 그대로다.
나달나달한 진료기록. 거기에는 이 병원의 헐거운 유리문을 드나들던 사람들의 40년 역사가 있다. 원장님의 건강을 지켜주신 여러 환자들의 보답에 감사드리며 이제 서서히 병원 문을 닫으려한다. 원장님의 아호 유당. 유자나무 향이 흐르는 집. 원장님의 노구 피로하지 않도록 기원한다. 옥 체 보 전 하 시 와 요….’
●‘여름은 위대했지’
강 내과가 문을 닫기 이틀 전, 4월 28일 저녁 ‘유당 강형용 박사 종업(終業)기념 모임’이 열렸다. 강 박사가 주치의로서 보살핀 환자 손님을 위주로 125명이 자리를 메웠다.
황금찬 시인의 축시는 ‘강 박사 종업의 종을 울리며’였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아! 깃발은 눈부시게 휘날렸지. 이제 여름이 가고 가을도 기울고 있습니다. 그 바람 같은 지혜의 평생이 오늘로 나부낌을 멈추려 합니다. 여름은 위대했고 여름은 가고 지금은 늦은 가을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는 발소리는 아직 귀에 멀리 있습니다-”(일부 인용)
마무리는 사위 최준식 교수의 반주로 합창한 ‘매기의 추억,’ 참석자들은 그 안단테 곡에 마음이 젖어들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매기 아아 희미한 옛 생각.”
●유자 열매
1966년 10월 5일 개원 - 2007년 4월 30일 폐원.
서울 중구 광희동 좁은 골목 입구에 있는 작은 4층 건물(대지 20평)에서 ‘강 내과’ 의원 간판이 철거되던 날, 강 원장은 중구 보건소와 세무서 두 곳에 직접 나가서 폐업신고를 했다. 강 원장과 30년을 함께한 53세의 간호사 김정희는 의료관리공단에 전화로 폐업을 알렸다. 그녀는 처녀 적에 강 내과에 들어와서 결혼하고 병원 건물 2층에 살림을 꾸리고 아들을 낳으며 강 내과와 함께 나이를 먹은 여성이다.
원장실에 놓인 책상은 100년이 넘는 조선목기(朝鮮木器) 골동품으로 병원을 열었던 그 날 이후로 아직 그대로다.
강 원장은 나를 만나자 대뜸 폐업 편지에 환도뼈도 성하고 무릎도 별 탈 없다고 한 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고 묻는다. “내 메타포지. 환도뼈는 허리뼈니까 허리뼈와 무릎이 성해야 리비도(성적욕망)가 멀쩡하고, 남자행위를 할 수 있다는 말이요.”병원을 폐업한다면 죽을병이나 걸린 줄 알 테니까 그 구절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는 의사란 본질적으로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행림(杏林)이 되는 직업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오나라의 동봉(董奉)이라는 의원이 치료비 대신 살구나무를 한 그루씩 심게 해서 살구나무 숲(행림)을 만들었다는 고사의 인용이다. 행림은 ‘고통을 구해서 즐거움을 만드는’ 구고위락(救苦爲樂)을 행하는 의원이다.
84세의 부인은 소박한 모습에 아직도 열정적으로 봉사의 삶을 사는 것으로 소문났다. 작년에 회혼(回婚 ㆍ결혼 60주년)을 보낸 강 원장은 6녀 1남을 낳아서 키운 것을 ‘유자나무’의 큰 수확으로 여긴다.
“우리 직계가족은 이제 손주 15명, 증손녀 1명이 더 생겼다.” 금년 이른 봄, 강 원장은 자기 아호를 따서 손주들의 모임인 유실회(柚實會)를 만들고 “유자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탐스러운 과실이여”라는 붓글씨를 썼다.
●‘죽음학’ 사유 한다
강 원장을 구도적(求道的) 의학자라고 지칭하며 문장을 칭송한 것은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였다. 이문구는〈유당 강형용 고희문집〉을 받고 6시간 동안에 완독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웠다고 강 원장에게 편지(1992년 1월 27일자)를 보낸다.
“선생님의 전반 역정 70년을 축하하옵고, 남은 후반 예정(豫程) 70년을 다시금 축하합니다. 선생님은 시인이신 것을 ‘해운(海韻)’을 읽고 알았습니다. 대해의 풍랑을 아가씨의 옷자락으로 그려 놓으셨으니 시인이 아니시고 싶으셔도 어쩔 수 없으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거듭 탄복한 것은 언어나 문자도 매우 절약하시는 것이었습니다….”(부분 인용)
유당 강형용은 의술을 베푸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 왔다. 앞으로는 첫째 푸른 땅을 밟으며 여행하는 ‘청답지유(靑畓之遊)’를 이행하고, 둘째 신앙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셋째 죽음에 대한 연구(독서)를 하겠다고 예정을 짜놓았다.
죽음의 아픔은 근원적 소외가 주는 아픔이고 상실이므로 의학자는 죽음학(타나톨로지)을 통해 죽음의 소외를 치유하려고 고민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사위 최준식(이화대 한국학과 교수)이 ‘한국죽음학회’ 회장이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한국일보 2년차 경찰기자이던 나는 강형용 박사가 원장으로 있던 서울시립남부병원 시체실에 잠입하는 무례를 범했고, 경찰 수사본부를 앞질러 홍원기 선임기자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특종을 했다. 나와 강 원장의 인연은 44년 후 청답지유를 행하려는 시니어로 그를 취재하는 데까지 이른다.
■ '기분좋은 QX'가 제공하는 트렌드 ABC
자신이 결정하는 장노년 휴가
'그린 올드 에이지'라고 부르는 노익장은 거침도 없고 지침도 없다. 산업화 시대에는 대부분 60세 초로에 은퇴 휴가를 가졌다면 오늘날은 70세 장 노년 혹은 80세 중 노년에 생애 휴가를 갖는 경우가 늘어난다.
직업이나 조직 안에서 예정된 퇴직이 아니라, 자기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자의에 의해 실질적인 은거를 감행한다. 노년기라고 해도 청년기 못지않은 학습과 도전, 재취업으로 격동을 맞이하기 때문에, 고령세대는 자기 도전을 마무리를 지을 순간을 별도로 정하고 그때 비로소 휴가를 결정하는 셈이다.
이런 일은 상대적으로 화이트컬러 혹은 전문직 이상에서 가능해 보였으나 점차, 다른 계층 및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로 퍼질 것이다.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은퇴한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인생을 연장하는 한 그들의 구도적 삶, 도전적 삶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홈페이지 www.givenzoneqx.com
안병찬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ann-bc@hanmail.net사진 원유헌 기자 youhone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