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파 병원을 찾을 때마다 늘 어떤 의사를 만나게 될까 신경쓰게 된다.
병원에 자주 들락거린 편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레 다양한 부류의 의사를 만났다. 가슴 아린 사연까지는 아니지만 따듯한 가슴을 만난 일도 있었고 짐짝 같은 취급에 섭섭한 경우도 있었다.
늘 <사랑의 기적> (페니 마샬 감독, 1990)에 나오는 세이어 박사처럼 따듯하고 헌신적이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길 기대하며 병원 문을 연다. 사랑의>
뇌염의 후유증으로 영원한 잠에 빠져든 환자들을 돌보게 된 말콤 세이어. 정신은 잠들고 근육은 굳어버렸지만 환자들의 내면은 깨어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환자의 이름을 부르고 음악을 들려준다.
파킨슨씨병의 특효약으로 알려진 엘도파에 대한 소식을 들은 세이어는 이 약물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이 약으로 환자들을 잠에서 깨웠다. 하지만 잠시 깨어났던 이들은 다시 잠에 빠져든다. 믿음, 사랑, 그리고 열정으로도 넘지 못할 벽이 있다.
사실 현대 의학이 진단이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질병은 전체의 30%가 채 안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의학자라면 남은 70%의 질병을 정복하는데 매진해야겠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일.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의사들처럼 환자와 상담하는 역할도 필요할 것이다. 이런 업무 분담이 어떤 비율로 이뤄지는 것이 좋을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나라 동네 병원들은 상담만 해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아우성친다. 그래서 부가적인 처치나 검사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건강보험 제도의 일부를 따 온 영국과 사뭇 다르다.
영국은 1948년부터 전 국민에게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30만 명이 넘는 사람을 고용하고 있는 영국의 국민의료보험은 세계에서 중국 인민군, 인도 철도공사, 월마트 다음으로 거대한 조직이다. 전적으로 세금에 의존해 운영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의료자원을 공평히 배분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1차 진료를 맡고 있는 일반 개업의의 주요 업무는 동네 사람들과 상담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일단 아프면 일반 개업의를 찾는다. 이들은 환자 상태를 판단해서 간단한 검사를 하거나 적당한 약을 처방한다. 환자가 중환이라 대학병원과 같은 상급 병원에 치료를 의뢰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도 일반 개업의의 몫이다.
그래서 환자와 상담하면서 주의 깊게 상태를 살핀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눈과 왼쪽 신경계에 문제가 있어 일반 개업의와 여러 차례 상담을 했는데, 상급 병원에서 전문의와 상담하는 기회를 갖기까지 무려 1년 넘게 걸렸다. 전문의와 만나 MRI를 찍어보기로 하고 실제 찍을 때까지 또 다른 6개월이 필요했다. 계속 상담에 응하고 상태를 지켜보지만 우리나라에서처럼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법이 없다.
이렇게 느린 시스템 때문에 병을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상당수의 만성질환자들이 치료 받을 때까지 기다리느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영국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병이 없거나 중하지 않다고 가정하고 진료를 한다. 분명히 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샅샅이 들추려 드는 우리나라 의사의 자세와는 거리가 있다.
신생아 황달은 신생아들에게 흔한 증상이다. 황달이 오면 적혈구가 파괴되었을 때 생기는 빌리루빈이 다량으로 나와서 피부색이 누렇게 된다. 대부분의 신생아에게서 볼 수 있는 증상으로 생후 3, 4일 경에 나타나서 5, 6일 경에 가장 심해졌다가 7~10일이 되면 없어진다.
뱃속에서는 엄마가 빌리루빈을 대신 처리해 주었지만 갓 태어난 신생아는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그 능력을 갖출 때까지 빌리루빈이 일시적으로 상승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라도 모유 수유를 잠시 중단하면 대부분 좋아진다. 물론 간 기능에 이상이 있거나 감염 등의 이유로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많이 파괴돼서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위험할 수도 있어 적극적인 처치가 필요하다.
우리 집 아이 둘이 모두 신생아 황달이 심했다. 큰 녀석은 영국의 대학병원에서, 작은 녀석은 우리나라의 대학병원에서 처치를 받았다. 영국에서는 의사들이 정해 놓은 위험 수치 밑에서 오락가락하는 큰 녀석의 빌리루빈 수치를 계속 모니터 하면서 여러 날을 보냈다. 결국은 수치가 떨어지고 아무런 처치 없이 황달은 물러갔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신생아 집중 관찰실에 입원을 시키고 광선 치료와 항생제 투여를 시작했다. 그리고 척수액 검사, 뇌와 복부 초음파 스캔을 퓰쳬杉? 이틀 만에 빌리루빈 수치가 떨어졌지만 갑자기 요로 감염이 의심된다고 일주일 동안 입원을 더 하라고 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항생제를 주사로 투여하겠단다.
아무런 증상 없이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를 병원에 더 두기 싫어 임의 퇴원서를 쓰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항생제를 한 다발 받아 왔지만 먹이지 않았다. 며칠 후 외래 진료를 통해 모든 검사에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영국에서는 참고 기다리는 것 때문에 힘이 많이 들었다. 해야 할 검사나 치료가 있다면 빨리 해서 답답함을 풀고 싶은 조바심이 들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의 확률이라도 있으면 모든 검사를 다 해보려고 들어 무서웠다.
의사들은 빌리루빈이 뇌를 침범해 신경계가 무너질 수 있고 요로감염은 신장 기능을 망가뜨릴 수 있다고 겁을 줬다. 여간해서 병원을 그냥 나서기가 힘들다. 물론 이런 일이 경제적 이유가 아닌 환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고 싶다.
한미FTA가 비준되면 의료시장도 개방의 물결을 맞이할 것이다. FTA의 기본 정신이 양국에서 자유로운 이윤추구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거대 의료자본이 들어와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이윤 만을 염두에 두고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들이 많아질까 두렵고, 빈부 격차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차이가 확연한 사회가 될까 무섭다.
영화 <존큐> (닉 카사베츠 감독, 2002)에서처럼 죽어가는 아들을 곁에 두고 병원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아버지가 나와서야 되겠는가. 의료보험도 없고 정부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가 무장 점거를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은 아들의 이름을 심장수술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것 뿐이었다. 존큐>
첨단기술과 거대자본으로 무장한 미국에서 수천만 명의 무보험자는 최소한의 의료마저 거부당하고 있다. 미국 흑인 영아 사망률은 방글라데시보다 높다고 한다. 반면 보험 환자들은 병원 수익을 위해 비싼 첨단기기 사용과 불필요한 수술을 강요당하는 것이 미국의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 기존 의학체계 바깥의 목소리
병원의 표준화한 규정을 벗어나 독자적 방식에 따라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대체의학이라고 한다.
의사들은 대체의학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방법들이 의학적 근거가 희박하다며 의료 행위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의학의 처방과 치료도 서구에서는 대체의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표준화한 치료를 이용할 수 없거나 효험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의학에 적잖은 기대를 거는 것이 현실이다.
대체의학은 때로 표준화한 서구식 의료 철학에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는 운동의 성격도 띤다.
예를 들어 서구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다윈 의학'은 인간의 몸과 정신이 다른 동물처럼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산물임을 인식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질병은 기름을 치거나 부속을 교체하면 해결되는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석기 시대 환경에 어울리는 몸을 가진 사람이 현대에서 생활하다가 병이 생긴다면, 몸을 고치기보다는 습관을 고치는 것이 옳은 치료법이라는 얘기다.
최근 '현대판 화타'로 불린다는 장병두 옹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기소되면서 대체의학의 허용과 관련한 논란이 일고 있다
. 그가 신의(神醫)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보다는 표준화한 의료체계의 '바깥'을 허용할 수 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근대적 의료면허 체계의 틀을 허물 수도 있는 문제다.
아직까지는 관련 단체들의 반발 때문에 유사의료행위에 관한 근거 규정을 마련하는 일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존 의학체계 바깥에 있는 지혜의 쓸모를 따져보고, 쓸모가 있다면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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