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를 마치면 곧 박사과정을 밟으려 했는데 주변에서 말린다. 평생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비정규직으로 떠돌 수 있는데 공부는 더 해 뭐하냐는 뜻이다. 이 바닥에선 석사학위로는 박봉의 병원 임상연구원만 할 수 있어 암담할 따름이다.”
지방대 생물학과를 나와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서 석사과정 연구원으로 일하는 A씨(28)는 “공부를 계속해야 할지”고민이다.
최근 노동부가 박사학위 소지자는 해당 분야에 2년 이상 종사해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는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안을 발표한 이후 고민은 깊어졌다. 7월 비정규직 관련 법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이공계 비정규직 연구원들의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다.
월급이 90만원인 A씨는 4대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 연구원이다. 그는 “지도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아야 괜찮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지만 석사 출신으로 정규직 기회를 노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연구가 좋아 택한 길이지만 아이를 낳으면 절대 이공계에 보내지 않겠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부는 과학연구 인력의 교육과 취업을 지원하는 ‘과학인력 양성체계 계획’을 4월 대통령에 보고 했지만 현실은 이처럼 “공부를 더 하면 손해”라며 발목을 잡는 실정이다.
이공계 비정규직의 증가가 연구경쟁력을 저하시킨다는 지적은 새로운 게 아니다. 정부출연연구소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규직 정원을 감축하면서 비정규직 연구원은 급격히 양산됐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에 따르면 27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 직원 1만9,967명 중 비정규직은 9,479명(47.5%)이며 이중 4분의 3이 연구인력(7,009명)이다.
정부출연연이 2001~2005년 새로 뽑은 연구직 중 박사급 49.2%, 석사급 77.5%가 비정규직이다. 또 비정규직 박사급 연구원들은 정규직보다 절반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급 100만원 안팎의 학생 연구원을 뽑아 쓰는 대학병원과 마찬가지로 정부출연연도 인건비 부담을 비정규직에 전가하고 있는 셈이다.
비정규직 연구원 대다수는 정규직과 똑 같은 연구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여러 모로 차별을 받아 연구에 전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최근 1년 계약으로 대학 연구교수가 된 B씨는 지난 1년 사이 3번이나 직장을 옮겼다.
해외에서 박사후 과정을 마친 B씨는 한 정부출연연에서 일하기로 했지만 갑자기 정원이 동결되자 지난해 3월 급한 대로 다른 연구소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B씨는 “위촉연구원 등으로 갔을 땐 내가 직접 기획할 수 있는 연구과제가 없었다”며 “주어진 연구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앞길이 보이지 않아 옮기게 됐고, 연구기관 입장에서도 과제가 제대로 진척되지 못한 셈”이라고 말했다.
박사 연구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더라도 2년 만에 해고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어 이번 시행령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임금수준이나 연구과제의 기획·책임권한, 승진까지 정규직과 동등하게 대우 받는다면 안정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관련 법이 규정하고 있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가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대학 또는 민간 병원의 연구소는 근무환경이 열악하다. 병원 연구소의 비정규직 연구원들은 계약서나 퇴직금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병원이나 정부출연연에 흔한 석·박사 과정 학생 연구원들은 논문과 무관한 실험실 업무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박봉에 시달린다. 노동부 관계자는 “학생 연구원도 비정규직 근로자에 해당하므로 7월부터는 비정규직 관련법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고 밝혔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고용주가 “학력과 능력에 따른 차이일 뿐 비정규직 차별이 아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데다, 제소 대상이 지도교수가 될 수도 있어 섣불리 차별철폐를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국공공연구노조의 이광오 정책국장은 “현재 정부출연연의 인건비 관리 규정은 잉여금이 비정규직에게 돌아갈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휴가도 정규직과는 달리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학회참석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같은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이 우스운 인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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