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편을 무심코 넘기지 않은 시민의 아이디어로 ‘식품 유통기한 표시’ 제도가 완전히 탈바꿈하게 됐다. 그 동안 식료품 등 먹거리 제품에는 유통기한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재료 등과 함께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6일 ‘식품의 표시 기준’을 올 상반기 중 개정하겠다고 밝힌 것은 국내 유통기한 표시제의 대수술을 의미한다. 우선 유통기한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진다. 앞으로는 식품이 쉽게 변질하는가 여부에 따라 ‘소비(사용)기한’과 ‘품질유지기한’이라는 명칭이 쓰인다. 김밥, 두부와 같이 상하기 쉬운 식품은 소비(사용)기한을, 과자 등 다른 제품은 품질유지기한을 표시하도록 했다.
식약청 관계자는 “유통기한은 제품의 유통, 판매가 가능한 기한을 의미할 뿐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언제까지 이용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혼란을 줬다”며 “특히 부패하기 쉬운 식품은 엄격한 유통기한을 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소비ㆍ품질유지기한 설정도 업체가 아니라 식약청이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 식약청은 금명간 ‘식품 유통기한 설정기준안’을 마련, 제조ㆍ가공업체가 실험을 통해 기한을 정하도록 하고 식약청에 기한 설정 사유서를 내도록 할 방침이다.
기한 표시도 한 눈에 쏙 들어오게 바뀐다. 지금까지 제품마다 들쭉날쭉하던 기한 표기를 포장지 앞면 위쪽으로 고정하는 한편, 제조일자도 함께 표시하도록 의무화했다. 특히 제품명에 붙여 쓰도록 해 소비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글자 크기도 7포인트에서 10포인트로 늘렸다. 식약청은‘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 아이디어도 표시가 가능한 일정량의 제품부터 적용하도록 권고해나갈 방침이다.
이렇게 뛰었습니다
이번 식품 유통기한 표시 개선은 시민, 시민단체, 언론이 힘을 합쳐 이뤄냈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생활혁명’에 청신호를 밝힌 것으로 평가된다.
박태현(35), 오명환(27), 호종훈(27)씨 등 시민들이 제안한 관련 아이디어는 지난해 11월 희망제작소가 연 사회창안포럼을 통해 처음 공론화됐다. 한국일보는 당시 이를 기사화했으며, 희망제작소 행정자치부와의 공동기획 ‘이건 어때요? 시민의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꾼다’를 통해서도 2차례(3월27일, 4월17일) 보도했다.
특히 희망제작소는 보건복지부와 식약청 등 관계기관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정책제안서를 보내는 등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희망제작소 정기연 연구원은 “누구나 느꼈을 생활 속의 불편함을 시민의 이름으로 바꿔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제안자 박태현씨 "뿌듯… 장애인 배려 더 고민을"
3월 말 희망제작소에 '아이스크림과 빙과류에도 유통기한을 표시하자'고 제안했던 박태현(35ㆍ회사원)씨는 "제 아이디어가 정책에 반영돼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 뿌듯하다. 이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준 희망제작소와 한국일보에 감사 드린다"며 자부심과 고마움을 동시에 전했다.
박씨는 "포장지 구석에 꼭꼭 숨어 있던 유통기한이 전면에 표기되고 깨알 같던 글자도 커진다면, 시민들이 그 동안 느끼던 불안감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특히 '제조일자ㆍ사용기한 병기' 방침에 대해 "소비자들로선 제품 상태에 대해 더욱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는 박씨는 전공을 살려 "유통기한 표시 기법을 혁신하자"는 아이디어를 추가로 냈다. 숫자와 글자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그래픽적 요소도 과감히 도입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시간이 일정 정도 지나면 색이 변하는 신호등 모양으로 유통기한을 표기하면 소비자들이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박씨는 식약청의 개선안 발표에도 불구, 지금과 같은 표기 방식은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이라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기도 한 방법이겠지만, 모든 제품에 적용하기 어렵다면 다른 대안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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