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의 대통령 선출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는 터키가 헌법재판소의 대선 1차 투표 무효결정으로 언뜻 수렁에 한층 깊이 빠졌다.
헌재는 에르도간 총리의 집권 정의개발당(AK)이 단독 후보로 내세운 압둘라 퀼 전 외무장관을 놓고 지난 주 의회가 실시한 1차 투표에 재적 550명의 3분의 2인 367명에 못 미치는 361명만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효를 선언했다.
퀼 후보는 야당 공화인민당(CHP)이 불참한 가운데 357표를 얻어 재적 3분의 2 지지 획득에 실패, 2차 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당선자를 내지 못한 의회 표결을 굳이 무효라고 선언한 것이 의아하다.
■ 의문을 푸는 첫번째 단서는 헌법 규정상 1,2차 투표의 의결정족수는 재적 3분의 2 이상이지만, 3차는 재적 3분의 1 이상 참여에 단순과반수 찬성인 점이다.
집권 AK당이 3분의 2 가까운 의석을 가진 상태에서 늦어도 3차 표결에서는 퀼 후보가 당선될 것이 뻔하다. 그러나 헌재가 야당의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1차 투표 자체를 무효화한 마당에는 2, 3차 투표로 갈 수가 없어 헌정 절차가 교착 상황에 처한 것이다. 두 번째 단서는 겉보기 민주 헌법정신에 부합하는듯한 헌재 결정이 법리와 헌법 관행에 반한다는 사실이다.
■ 헌재의 무리한 결정에는 정교(政敎)분리의 세속주의적 국가 정체성을 지키려는 야당과 군부 등 기득권세력의 이해가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보수세력은 이슬람주의 정당 AK당이 의회와 정부에 이어 초월적 중재자인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껴 대규모 군중시위를 조직하고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특히 건국이래 정치개입을 일삼은 군부는 이슬람주의자 대통령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까지 4차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군부는 97년에도 문민총리를 압박해 퇴진시키는 힘을 과시했다.
■ 이런 맥락에서 이번 사태는 '포스트모던 쿠데타'로 불렸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할 만큼 성장한 나라에서 군이 탱크를 몰고 나올 수는 없지만, 기득권 세력을 결집해 정치 판도를 바꿀 수는 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보수세력보다 훨씬 넓은 대중적 기반을 지닌 에르도간 총리는 한껏 자제하는 척하다가 위헌결정이 나오자 조기 총선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내건 승부수를 내밀었다. 그리고 사회 저변의 민심 흐름에 비춰 통치기반을 한층 굳게 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치를 보는데도 '포스트모던'한 시각이 필요한 시대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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