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쪽에 병풍처럼 펼쳐 놓은 듯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 북한산국립공원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들이쉬는 물과 공기의 고마움을 실감하지 못하듯 너무 가까이에 있어 그 진가를 간과하고, 마음 편히 그곳을 찾으면서도 고마움을 모르며 심지어 훼손이 되든 말든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북한산과 도봉산을 연결하는 안부에 서울 우이동에서 양주 교현리 음정마을을 잇는 6.8㎞의 우이령길이 있다. 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이다.
1993년 서울시와 경기도가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를 받지 않은 채 이 길을 확ㆍ포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59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1994년 6월 착공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교통문제 전문가, 생태 전문가, 환경단체 회원, 자연 애호가 등 평소 북한산을 아끼던 사람들이 이를 두고 볼 수 없다며 반대운동을 펴기로 했다.
환경운동가 차준엽, 김덕수 사물패 등이 참가한 가운데 그 해 6월 4일 도봉구 방학동의 8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에서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19일, 프레스센터에서 운동을 좀 더 체계를 갖춰 본격적으로 하자며 우이령보존협의회를 창립했다.
산악인, 교수, 작가, 시인, 자연보호가 등 250여명이 참석해 반대 운동의 시동을 걸었다. 한국자연보존협회 우한정 사무총장, 사립중ㆍ고등학교장회 엄규백 회장, 김인식 서울시 산악연맹 회장, 이인정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 한마음운동본부 본부장 오! 태순 신부가 공동대표로 추대됐다.
원병오 자연보호협회 회장, 권효섭 한국등산학교 교장,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 소설가 김성동, 노융희 배달환경연구소장, 유인태 국회의원, 이재돈 청년환경학교 교장, 차동광 도선사 주지 등이 자문위원으로 추대됐다. 나는 실무를 담당하는 운영위원으로 참가했다.
우리는 우선 사전답사를 거쳐 4월 17일 우이령 걷기대회를 가졌다.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69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으니 25년 만에 공식적으로 길을 개방한 행사였다. 이 자리에는 7,000여명이 참가해 우이령 주변의 자연 생태와 경관을 확인했다.
참가자들은 ‘2천만의 허파, 이곳만은 지키자’ ‘서울 정도 600년에 진산 파괴 웬 말이냐!’ ‘우이령길 포장되면 도봉, 북한산 끊어진다’ ‘바위고개 우이령, 러브호텔 길목 된다’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우이령을 넘어 군유격장까지 걸으며 반대 의지를 보였다.
매스컴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그러자 이회창 당시 국무총리는 사업을 신중하게 검토하라고 지시했고 마침내 9월 20일 국립공원위원회가 우이령 도로 확ㆍ포장 계획을 만장일치로 부결했다.
정부가 예산까지 책정한 국책사업을, 환경 문제를 이유로 중지시킨 첫 사례여서, 그해 12월 우이령보존협의회는 ‘올해의 환경인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우이령보존협의회는 한시 기구였기 때문에 그 해 연말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활동보고를 한 뒤 해체됐다.
우이령의 파괴는 막았지만, 환경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남설악 점봉산 부근에서 양수발전소 건립을 위한 댐 건설이 추진되고, 한라시멘트는 백두대간 자병산 일대를 훼손하고 있었으며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이유로 무주에서는 대규모 슬로프 건설이 추진되고 영월에서는 홍수조절 등을 명분으로 동강 영월댐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국토 훼손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보존협의회의 운영위원이 주축이 돼 95년 1월 준비모임을 갖고 새 조직을 꾸리기로 했다. 국지적인 명칭이라 좀 걸리기는 했지만 역사적 의미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선호해 단체명을 우이령보존회로 결정했다.
나는 우이령보존회에 참가한 조상희 코리아타임스 기자, 에베레스트 여성 원정 대원 이영순씨 등과 밤을 새워가며 <우이령신문> 을 만들고 우이동 계곡에서 새벽을 맞기도 했다. 우이령신문>
우이령보존회는 우이령 길 걷기와 어린이 생태학교 및 청년생태학교 개최, 우이령 길 모니터링 등의 정기 활동을 지금도 하고 있으며 영월 동강 보존 운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수문출판사 대표ㆍ우이령보존회장ㆍ한국내셔널트러스트 동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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