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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짐바브웨-마스빙고 결혼식 참례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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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아프리카 에세이] 짐바브웨-마스빙고 결혼식 참례기 (1)

입력
2007.04.30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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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몸이 약해 바깥에서 놀면 감기에 걸리거나, 누군가에게 얻어맞거나, 아니면 혼자 넘어져서 어딘가를 다치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 시절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부분이자 가장 좋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기 쉬운 상상이었다.

소중한 꿀이 저장된 꿀벌의 집처럼, 머리 속에는 각종 기억을 저장한 수많은 방들이 있고 그 중에서 좁고 긴 복도 가장 멀리 떨어진 방, 어슴프레 불을 밝힌 부드럽고 촉촉한 그 공간에는 코에서 콧물을 흘리거나 무릎에서 피 흘리던 어린 내가 아직 있어 먼 옛날 하던 짓들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영국인 휴 로프팅이 쓴 <둘리틀 선생 이야기> 를 아주 좋아해서 몇몇 구절은 줄줄 외울 수 있을 만큼 반복해 읽었다. 어떤 동물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한 선량한 박물학자라는 설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것은 책에 등장하는 독특한 여행법이었다. 눈을 가린 채 뾰족한 연필을 들고 빙빙 돌리다가 세계지도에서 한 군데 찍어서 그 곳으로 향하는 것.

나도 그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계속 드넓은 대양 어딘가만 나오다가 마침내 첫 번째로 제대로 찍은 곳이 이름도 생소한 짐바브웨(Zimbabwe). 실제로 그 땅에 닿게 된 것은 연필을 빙빙 돌리던 유년기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무렵의 일이다.

기차를 타고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 도착했다. ‘트윈픽스’라는 여인숙에 투숙했는데 어둡고 눅눅한 부엌에 부인들 몇 명이 앉아 달걀과 식빵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이 들어요, 아직 안 먹었으면.”

인심이 후한 이 아주머니들은 농업기술 세미나에 참석차 시골에서 상경한 농부들이었다. 농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인 짐바브웨는 과거 한국의 새마을 운동처럼 생산성향상 운동이 성행하고 있었다. 마스빙고(짐바브웨 남부의 작은 도시)에 갈 계획이라는 말을 듣더니 그 부근에 사는 치자라는 이름의 아주머니가 나를 초청, 그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하라레 외곽에 위치한 뭄바레 버스 터미널은 한쪽에서는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시장과 버스가 반반쯤 섞여 난장판이었다. 미세스 치자는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태연한 얼굴로 터미널에 나타냈다. 승객들은 닭 기르기가 유행인 것처럼 한 마리씩 옆구리에 끼고 버스에 올랐다.

치자 아줌마의 집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하고 한적한 농장이었다. 2년 전 남편을 잃은 후 시부모님과 함께 일곱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치자는 선생님으로 마침 내 또래라고 했다. 치자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신기한 듯 내 손을 잡고 킥킥 웃으셨는데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응, 빅토리아!”하며 감탄스러워 하셨다.

꼬끼오 닭 울음소리와 농부들의 노랫소리 덕분에 어두운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 생활은 태양의 주기에 따라 일상이 진행된다. 치자 아줌마는 벌써 일어나 닭에게 먹이를 주고 계셨다.

치자를 따라 고요한 밭으로 나가보았다. 우기에는 주식인 수수를 주로 기르지만 건기인 지금은 물 부족 때문에 몇 가지 야채만 기르고 있었다. 폭이 꽤 넓어 보이는 강은 완전히 말라붙어 있었다.

소와 염소가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시고 여자아이들은 항아리로 물을 퍼 올렸다. 이 누런 흙탕물이 인간과 가축의 식수이자 온갖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사용되고 있었다. 식사하기 전 작은 그릇에 담은 물을 여러 명이 돌려가며 손을 씻었다. 결벽증 환자들을 이곳에 보내면 치유에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이 없으니 손을 여러 번 씻는 사치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치자 할머니의 집이 가까이 있는 탓에 치자는 저녁을 두 번 먹는다.(점심은 보통 굶는다) 어머니 집에서만 밥을 먹으면 할머니가 섭섭해 한다는 이유로. 덕분에 나도 두 번씩 저녁을 먹게 되었다.

치자 할머니의 집에 가니 정갈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밖은 이미 캄캄했고 촛불 아래 놓인 음식은 형체가 희미했다. 치자는 싱긋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내가 좋아하는 특별 요리니까 한 번 먹어봐. 우리 할머니 특기야."

한 줌 집어서 자세히 살펴보니 땅콩버터를 반죽해서 볶은 붉은 개미다. 개미의 형체가 다리 한 올 한 올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생선 뼈다귀 튀김을 씹는 것처럼 고소하고 바삭바삭했다. 잘록한 몸통과 다리, 커다란 입이 정교하게 세공된 고급 스낵과도 같았다. 치자와 나는 개미핥기처럼 이 작은 영혼들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개미요리 조리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1. 개미를 준비한다. 개미탑에서 가느다란 막대기를 이용해 1~1.5cm 크기의 흰개미나 붉은 개미를 잡는데 두 종류 모두 맛은 비슷하다.

2. 재료를 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가열한다.

3. 개미가 죽었으면 입맛대로 간을 하는데, 간식용일 경우 소금만 뿌리고 반찬용일 경우는 땅콩버터를 같이 넣고 볶는다.

“너도 초대 받았으니 함께 가자.”

며칠 뒤 치자의 사촌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라고 했다.

20여년 뒤 너는 짐바브웨의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다. 현명한 누군가가 이렇게 예언했더라면 그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20년 후는 고사하고 내년 여름방학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어머니보다 더 향기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던, 성적표 받는 것과 예방주사 맞는 것이 무서워 눈물을 흘리고 싶던 그 시절.

결혼식이 열리는 마스빙고에 가기로 했다. 세월의 힘에 계기판이 다 뜯겨나간 르노를 타고.

하라레[짐바브웨]= 글ㆍ사진 소설가 박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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