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 회장이 다시금 혹독한 시련기를 맞고 있다. 1981년 불과 29세의 나이로 그룹(당시 한국화약그룹) 회장에 오른 김 회장은 그룹을 재계 서열 9위(지난해 매출액 24조원)로 성장시켜 경영능력을 인정 받았지만, 돌출적 행동으로 적지않은 루머도 나돌게 했다. 재벌 2세들 상당수가 부친의 가업을 수성하는데 실패한 채 재계 무대에서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김 회장은 지난 26년간 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오고, 사세도 크게 확장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 멘로대(경영학과)와 드폴대 대학원(국제정치학과)을 나와 한국화약의 설립자인 고 김종희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김 회장은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아 재계의 목소리를 내는데 한축을 담당해 왔다. 유엔한국협회장, 한미교류협회장 등도 맡아 껄끄러워진 한미관계 복원에 기여하기도 했다. 강신호 전 전경련 회장이 사의를 표명한 이후 전경련의 세대교체를 위해 강력한 리더십의 김 회장이 후임 회장 하마평에 오르기도 했다. 두둑한 배짱과 카리스마, 저돌적인 추진력이 그의 강점이라는 게 재계의 평이다.
실제로 그는 회장 취임 1년만에 제2차 석유화학 파동으로 경영난에 빠져 있던 한양화학(현 한화석유화학)을 전격 인수하는 과단성을 보여준 데 이어 외환위기를 예견하고 강도높은 구조조정을 미리 단행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그는 ‘고용승계’를 최우선시하면서 인간적 면모를 보여줘 ‘의리의 사나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의 매각 협상 시 김 회장이 “20억~30억은 손해 볼 테니 인수과정에서 근로자들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신속하게 매각 작업을 추진해 달라”고 제의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한화에너지 706명과 한화에너지프라자 456명에 대한 완전 고용 승계가 이뤄지게 됐다. 회사 매각 이후 문화의 차이로 다시 복귀하길 원하는 사람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받아주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김 회장에게 충성하는 임직원들이 적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김 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일화들도 많다. 동생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과의 분리 과정에서 빚어진 형제간 다툼으로 구속된 것이 그가 겪은 첫번째 시련이었다. 이후 대한생명 인수를 둘러싼 로비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으며, 대선자금 수사 때마다 장기 출국 의혹을 받아 구설수에 올랐다. 다소 감성적이면서 격정적인 성향의 김 회장은 이번 사건처럼 때론 분노나 열정의 분출로 이어져 시련을 자초하는 측면도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지적이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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