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남녀의 일에 엄연한 구별이 있음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시고 4남 1녀를 키우는 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당연한 ‘남자 일’ 빼고는 거의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체면불구하고 손수 시범까지 보이며 아들들에게 가르친 ‘여자 일’이 있었다.
뚫어진 양말을 꿰매는 간단한 바느질이었다. 도시에서는 전구를 넣고 양말을 꿰맸겠지만 전기가 들어오기 한참 전이었던 그 때는 다듬이 방망이를 대신 썼다. 떨어진 단추나 옷고름 다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배운 바느질이 군대 시절을 빼고는 쓸 데가 없었다. 집안에서 필요했던 바느질은 모두 어머니의 재봉틀이 떠맡았기 때문이다. 시집올 때 가지고 오신 ‘자노메(뱀눈)’ 재봉틀은 손틀에서 발틀, 다시 전동 틀로 모양은 바뀌었지만 60여 년의 세월을 잘도 견뎠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는 헤아리기도 힘들다.
4남1녀의 일상복이 대부분 거기서 만들어졌고, 결혼 때까지 내 사각팬티도 모두 거기서 나왔다. 작은 천 조각 하나라도 버리기 아까워 일일이 이어 붙인 알록달록한 천으로 만든 밥상 보자기나 베갯잇은 지금은 전시회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멋졌다.
■그 때 이미 웬만한 바느질은 재봉틀이 맡았기 때문에 한 땀 한 땀 손으로 뜨는 바느질을 가리키려면 ‘손바느질’이라는 말이 새로 필요했다. 편리하고 효율이 뛰어난 재봉틀 바느질이라도 오래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손바느질은 물론이고 재봉틀 바느질조차 추억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멀쩡한 새 옷을 일부러 해지게 하거나, 억지로 찢어서 멋을 내는 젊은이들은 많아도 구멍이 나거나 해진 옷이나 양말을 꿰매거나 기워서 입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바지 줄이는 간단한 바느질도 대개는 세탁소나 수선집에 맡기는 세상이다.
■무형문화재 89호 ‘침선장’ 기능보유자인 정정완 선생이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침선’이 바늘과 실을 뜻하니 마르고, 시치고, 박고, 감치고, 공그리고, 휘갑치고, 사뜨는 등 모든 전통 바느질에 달통했던 최고의 바느질꾼이었다.
정인보 선생의 맏딸로 동생 7남매를 돌보았고, 나중에는 4남5녀를 훌륭하게 키웠으니 맏딸 맏며느리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이 두루 겹쳤다.
그래서 선생의 바느질이 유난히 정겨워 보였던 것이리라. 오랜 세월 한국 여인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바느질이 오래 된 흑백사진처럼 빛이 바래간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