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인 직업훈련이 재취업의 필수 코스가 되면서 종합기술 전문학교인 한국폴리텍대학이 제2인생을 찾는 40대 이상 준고령자들의 '일자리 희망학교'로 주목받고 있다. 10대 후반~20대가 재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과거와 달리 40대 이상 입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 2001년 전체 학생의 1.2%에 불과했던 40대 이상은 올해 4.6%까지 올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로 고용 시장의 유연성이 확대되면 직업훈련을 받기 위해 폴리텍대학을 찾는 늦깎이 학생이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컴퓨터응용설계과 졸업 56세 이건상씨 "나이 잊은 의지로 보람의 새 일터"
직장인 아들과 대학 3학년 딸을 둔 이건상(56)씨는 “입사 5개월차의 풋풋한 새내기”라고 소개했다. 그는 인천의 밸브제조회사 태원테크에서 선반가공 일을 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회사 생산 라인에서 일했던 그는 지난해 4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는 지난해 8월 고용지원센터를 통해 폴리텍Ⅱ 인천대학에서 진행하는 3개월 과정의 컴퓨터응용기계설계 실업자 직업훈련을 들었다. 컴퓨터를 알아야 젊은 사람들한테 밀리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산업 현장의 컴퓨터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생소한 용어는 물론 화면도 너무 복잡했다. 그러나 기계 관련 일을 오래 한 게 도움이 돼 적응은 빨랐다. 반도 못 알아 듣던 강의가 시간이 지나면서 귀에 들어왔다.
과정이 끝날 무렵 컴퓨터로 작업 공정을 제어하는 태원테크의 업무 담당자로 채용됐다. 전 직장에 비해 40%정도 월급이 깎였다는 그는 “아내가 정육점을 해 번 돈과 내 월급으로 딸 아이 등록금 대면서 근근히 산다”고 말했다.
이씨는 “나이에 연연하지 말고 항상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는 폴리텍 같은 정부의 직업훈련기관을 다니면서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자동차학과 졸업 42세 윤승노씨 "1년 간 딴 관련자격증 7개 든든"
1994년부터 한강 유람선 선박수리 일을 해 온 윤승노(42)씨는 2004년 10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그는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루 12시간씩 물에 떠 있는 생활은 무척 고단하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금은 폴리텍대학에서 정식으로 배운 기술을 밑천으로 살아간다”며 웃는다. 2005년 3월 폴리텍Ⅰ 서울강서대학 자동차학과 1년 과정에 입학한 그는 검사기사, 정비기사 등 자동차 관련 자격증을 무려 7개나 땄다. 그는 “폴리텍에서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이론과 기술을 배운 덕에 자격증도 따고 일자리도 구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난해 3월 경기 수원시의 자동차정비공업사에 취직했다. 직원이 6명인 이 곳에서 그는 자동차 검사 부문을 맡고 있다. 땅에서 평소 원했던 자동차 일을 하고 있으니,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후회는 있다. “엄청나게 깎인” 월급을 받을 때가 그렇다. 그의 연봉은 전 직장에 비해 1,000만원이 적다. 중1 딸과 초등 5학년 아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우체국 택배사업본부에서 텔레마케터로 취직한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윤씨는 “몇 년 더 경험을 쌓은 뒤 자동차정비센터를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노측정학과 졸업 43세 이미향씨 "전업주부서 회사 골라 가는 인재로"
이미향(43)씨는 2004년 11월 충남 천안의 자동차 에어컨 부품 제조회사 두선정밀에 입사했다. 1992년 결혼한 이후 12년 만에 다시 사회 생활에 나섰다. 그는 “아줌마가 어엿한 직장을 잡을 수 있었던 건 폴리텍대학에서 배운 기술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2003년 3월 경기 안성시의 폴리텍여자대학 나노측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초등 5학년 아들과 남편의 뒷바라지만 했던 그는 “잊혀져 버린 내 인생을 되찾기 위해” 입학을 결정했다. 교육 공무원인 남편도 원서를 써 주는 등 적극 도왔다.
공부는 어려웠다. 겨우 독수리 타법을 벗어난 컴퓨터는 정말 힘들었다. 강의는 전문 용어가 많아 절반도 못 알아 들었다. 전공 책 역시 암호 해독 수준이었다. 그는 “20년 가까이 어린 동기들이 친절히 도와줘 무사히 졸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노측정 기술을 이용해 제품의 불량 여부 등을 판단하는 정밀측정을 담당한다. 주부 시절엔 그렇게 길던 하루가 요즘엔 눈깜짝할 새다. 한때 주부 우울증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무척 밝아졌다. 남편 바가지 긁는 일도 없다. 이씨는 “나노측정학과는 취업 의뢰가 많이 들어와 회사를 골라 갈 정도”라며 “성격이 꼼꼼한 분들에게 권할 만하다”고 말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한국폴리텍대학은
노동부 산하의 국립 종합기술전문학교(Polytechnic college)인 한국폴리텍대학은 지난해 3월 24개 기능대학과 19개 직업전문학교가 통합돼 출범했다. 서울, 인천ㆍ경기, 호남ㆍ제주 등 전국을 7개 권역으로 나눠 폴리텍Ⅰ~Ⅶ대학으로 구분, 각 권역에 3~8개의 지역 캠퍼스를 두고 있다.
폴리텍대학은 전문대와 유사한 2년제 산업학사 학위 과정과 3개월, 6개월, 1년 과정의 직업교육훈련이 있다. 산업학사 과정은 고졸 학력이면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2년제의 경우 등록금은 학기 당 100만원 선이며 기숙사비와 교재는 무료다.
직업교육훈련은 교육비는 물론 실습재료비 기숙사비 식비 모두 무료다. 이론과 실기교육 비율은 3대7이다. 선반, 용접, 기계 설비 등 우선선정직종 입학자는 월 20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학력제한 없이 15세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다.
폴리텍대학의 교육 목표는 취업과 동시에 현업에서 활약할 수 있는 실무형 인재의 육성이다. 산업 현장과 지속적인 연계를 통해 철저한 실무 중심의 교육을 한다.
교수 한 명이 대학 인근 기업들의 기술 변화를 파악하는 ‘1교수 10기업 전담제’를 도입, 교수들은 매일 ‘기업일지’를 쓰면서 기업 변화에 맞는 인재를 키우기에 힘쓰고 있다. 또 ‘졸업생 리콜제’를 통해 기업에 취업한 뒤 현장의 기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졸업생을 대학으로 다시 불러 재교육시킨다.
박용웅 폴리텍대학 이사장은 “교수들에게 강의 없는 날은 지역의 공장에 돌아다니면서 장비나 기술 등의 변화를 파악해 교육에 접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며 “폴리텍대학을 ‘기업을 제일 잘 아는 기술교육학교의 메카’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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