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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7> 알헤시라스-유럽의 끝, 아프리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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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도시의 기억] <7> 알헤시라스-유럽의 끝, 아프리카의 시작

입력
2007.04.2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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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헤시라스의 밤은 추웠다. 그 도시의 공기가 유별나게 차가웠다는 뜻이 아니다. 잠자리가 추웠다. 춥지 않을 수도 있었으련만, 내 경솔함 탓에 그 도시의 밤은 나와 내 친구들 모두에게 아스스하게 되고 말았다. 하룻밤에 15유로를 받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여인숙(스페인어로는 ‘카사 데 웨스페데스’라고 부른다.

영어로 직역하면 ‘게스트하우스’가 되는, 그럴 듯한 말이다)에 머물렀던 것이다. 딱딱한 침대와 이불 한 장, 전등 하나가 그 방이 거느린 ‘문명’의 전부였다. 전열기 플러그를 끼울 콘센트 하나 없었다. 우리는 알헤시라스에서 옷을 껴입고 잤다.

내 방 창문은 유리 한쪽이 깨져나가 있었던 데다, 안에서 잠기지도 않았다. 화장실 겸 샤워실도 층마다 하나뿐이어서 공동으로 써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복도 끝의 그 샤워실에서 더운 물 하나는 콸콸 나왔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우리는 꽤 무거운 여행가방을 3층까지 낑낑거리며 날라야 했다.

그 여인숙의 이름은 산미겔(성 미가엘)이었다. 대천사 미가엘의 집에서 나는 내내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나만이 아니라 내 프티부르주아 친구들도 이렇게 허름한 잠자리를 겪는 건 처음이었을 게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선, 벌이가 영 시원찮아 보이는 이 싸구려 여인숙에 ‘단체손님’을 끌고 온 것 같아 흐뭇함이 움찔거리기도 했다.

말라가를 떠나 지중해를 왼편으로 끼고 종일 달려 알헤시라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약간 ‘하이(high)’ 상태였다. 오던 길에 들러 세 시간 남짓 둘러본 산골 마을 카사레스의 몽환적 아름다움에 그 때까지 취해 있었다. 카사레스는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마을 같았다. 이슬람의 지배를 오래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건물들 자체가 본디 흰색을 주조로 삼고 있긴 하지만, 특히 카사레스는 온통 하양이었다.

길이라고는 가파른 비탈밖에 없는 그 마을의 몇몇 아이들이 오토바이를 타며 놀고 있었다. 머플러를 떼어낸 낡은 오토바이들이 불만에 가득찬 듯한 붕붕 소리와 함께 검은 매연을 뿜으며 비탈진 골목을 오르내렸다. 어쩌면 태어나서 한 번도 도회지에 나가보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마을에 갇혀 살았을 아이들이었다.

토속 와인을 곁들여 먹은 점심도 맛깔스러웠다. 양갈비구이와 올리브의 풍미가 혀에 계속 감돌았다. 카사레스를 떠나 다시 시작한 서행 길은 내 마음을 얼마나 간질였는지.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지중해를 이렇게 실컷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어둠이 내려앉은 뒤 알헤시라스에 도착해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안, 도무지 호텔이라는 게 보이질 않았다. 도시 한 복판의 알타광장을 중심으로 시내를 몇 차례 돌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큰길가엔 호텔이 없는 듯해, 주택가 골목길을 뒤져보겠다고 내가 자청했다.

철학자와 변호사를 차에 남겨두고, 시인과 나는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며 물어물어 산미겔 여인숙을 찾아냈다. 접수계에는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오누이가 앉아있었다. 아이들의 스페인어는 내 스페인어만큼이나 어눌했다. 아랍 아이들이었다. 해협 건너 모로코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일 터였다. 어른들은 자리를 비웠다 한다.

이 아이들이 보여주는 빈방들을 시인은 마땅찮아 했다. 과장하자면 한데나 다름없는 그 방에서 11월의 밤을 보내기가 심란했을 것이다. 알타광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친구들이 실망할까 걱정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밤에 잠자리를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그리고 싼 맛에, 그 집에서 묵자고 우겼다.

잠시 뒤 합류한 철학자와 변호사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뿐 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들이라고 어쩌겠는가. 도대체 버젓한 숙소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알헤시라스의 두 밤을 그 여인숙에서 보내기로 했다.

한 시간쯤 뒤, 내 선택이 경솔했다는 게 또렷이 밝혀졌다. 그 도시에 호텔들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가엘 대천사의 집에 짐을 풀고 한 잔 들이키려 부두 쪽으로 가보니, 바닷가와 나란히 뻗어있는 마리나 거리에는 호텔이 지천이었다. 알헤시라스의 호텔들은 바다 쪽에 몰려있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던 것이다. 그것을 나만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호텔이 늘어선 부둣가에서 친구들로부터 결국 핀잔을 들었다.

알헤시라스는 스페인 남단 타리파와 붙어있다. 지브롤터만(灣)을 사이에 두고 영국령 지브롤터와 마주보고 있다. (지브롤터만을 스페인 사람들은 알헤시라스만이라 부른다.)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문턱에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알헤시라스는 그 둘레의 패권을 둘러싼 열강의 분쟁을 통해서 세계사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1801년, 알헤시라스만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함대 사이에 벌어진 두 차례 해전(알헤시라스 해전)의 무대였다. 1906년에는, 해협 건너 모로코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리?프랑스와 이를 뒤집어보려던 독일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13개 열강의 국제회의(알헤시라스 회의)가 이 도시에서 열리기도 했다.

알헤시라스라는 도시는 모로인(스페인어 ‘모로’는 영어 ‘무어’에 해당한다)이라 불리는 북서아프리카 출신 이슬람교도(무슬림)들이 8세기에 처음 세웠다. 모로인들은 이 도시를 ‘알자지라 알하드라’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녹색 섬’이라는 뜻이다. (카타르에 본부를 둔 위성 텔레비전 방송국 알자지라가 바로 ‘섬’이라는 뜻이다.) 알헤시라스라는 오늘날 이름은 바로 이 아랍어 이름 알자지라 알하드라의 앞부분이 변한 것이다.

서기 711년 알헤시라스 근처에 처음 상륙한 무슬림들은 그 뒤 7년도 채 안 돼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지역은 짧게는 3세기, 길게는 8세기 동안 무슬림의 지배 아래 놓였다. 무슬림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되면서 기독교도의 소위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이 마무리된 것은 1492년이다. 알헤시라스는 1343년에 기독교도의 손에 넘어갔다.

그 긴 이슬람 시절, 이베리아반도에서는 로만어(라틴어의 속화 형태. 스페인어의 전신)와 아랍어가 함께 쓰였다. 이 지역 기독교도들이 쓰던 로만어 자체도 아랍어에 깊이 감염됐다. 그 시기에 아랍어는 이베리아반도 지배계급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반도 전체를 되찾은 뒤에도, 스페인어에는 아랍어의 흔적이 짙게 남았다.

알헤시라스의 예에서 보듯, 스페인 지명에도 아랍어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궁전’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왔고, 그라나다의 알람브라는 ‘붉다’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왔다. 또 히브랄타르(지브롤터)는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왔다. 타리크는 711년 지브롤터에 상륙한 베르베르족 우두머리의 이름이다. 아랍어에서 연원한 스페인 지명은 1,500개 정도로 추산된다.

이런 지명들을 포함해 오늘날 스페인어에 남아있는 아랍어 차용어는 4,000개가 넘는다. 일반 어휘 가운데 파생어와 복합어를 빼고 단순형태만 헤아려도 그 수가 850개에 이른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차용어들 넷 가운데 하나는 ‘al-’이나 ‘a-’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당장 알헤시라스만 봐도 그렇다. 일반명사의 예를 들어보자면 알헤브라(algebraㆍ대수, 영어의 앨지브러), 알고리트모(algoritmoㆍ알고리즘), 알칼리(alcaliㆍ알칼리), 알코올(alcoholㆍ알코올), 알키미아(alquimiaㆍ연금술), 알칸포르(alcanforㆍ장뇌), 알고돈(algodonㆍ면화), 아세이투나(aceitunaㆍ올리브), 아수카르(azucarㆍ설탕), 아툰(atunㆍ참다랭이), 아로스(arrozㆍ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로만어(스페인어)에 이 말들을 들여오면서 아랍어 관사 al을 그대로 둔 채 통째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영어 단어 bus나 taxi를 한국어에 차용하면서 관사 the를 붙여 ‘더버스’나 ‘더택시’ 꼴로 들여온 격이다.

이 아랍어 관사 al의 자음(/l/ 소리)은 (예컨대 /s/나 /z/ 같은) 혀끝소리(아랍어 학자들은 이 부류의 자음에 ‘해의 자음’이라는 문학적 이름을 붙였다) 앞에서 그 소리에 동화된다. 예를 들면 설탕을 뜻하는 아랍어 zucar는 앞에 관사 al이 붙으면 al-zucar가 아니라 az-zucar로 읽힌다.

이것이 스페인어에 azucar 형태로 차용되었다. 올리브를 뜻하는 스페인어 ‘아세이투나’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의 둘째 음절 이하에서 이라크 주둔 한국군 부대 ‘자이툰’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혀끝소리가 아닌 자음들(‘달의 자음’이라 불린다) 앞에선 관사 al이 제 형태를 유지한다.

앞에서 예로 든 차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스페인 사람들이 아랍어에서 들여온 말은 대개 과학이나 문명과 관련돼 있다. 당시 사라센제국의 과학 수준은 기독교 유럽보다 한결 높았다. 그리고 이런 문화 어휘들은 스페인어를 거쳐, 또는 직접 유럽 여러 언어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스페인어를 거치지 않고 아랍어에서 직접 차용되거나 다른 경로로 차용된 경우, 차용된 아랍어 어휘는 스페인어에서와 달리 관사가 떨어진 형태로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참다랑어를 뜻하는 스페인어는 ‘아툰’(atun)이지만, 여기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톤노’(tonno), 프랑스어 ‘통’(thon), 영어 ‘튜너’(tuna)에는 아랍어 관사의 흔적이 없다.

설탕(스페인어로는 ‘아수카르’지만 영어로는 ‘슈거’)이나 쌀(스페인어로는 ‘아로스’지만 영어로는 ‘라이스’)이나 장뇌(스페인어로는 ‘알칸포르’지만 영어로는 ‘캠퍼’)나 면화(스페인어로는 ‘알고돈’이지만 영어로는 ‘코튼’)를 가리키는 말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여인숙 산미겔 바깥의 알헤시라스도 을씨년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세비야와 알헤시라스가 같은 안달루시아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두 근처에 이르자, 항구 도시 특유의 활기가 파닥거렸다. 밤의 그 활기 속에서, 아랍어가 스페인어를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가 북아프리카 코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실상 알헤시라스와 그 둘레는 ‘유럽의 꿈’을 지니고 해협을 건너는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나 밀입국자들의 첫 기착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카페들이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던 터라, 우리는 술 한 잔 할 곳을 찾아 여러 곳을 기웃거렸다. 우리의 철학자가, 담배를 피우지 않을 뿐 아니라, 담배 연기 자체를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태여 알헤시라스를 찾은 것은 이 도시에 끌려서라기보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였다. 해협 건너 탕헤르가 우리 목표였다. 아프리카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1,300년 전 무어인들은 이 좁은 바다를 건너 알헤시라스로 왔다. 우리는 그 바다를 거꾸로 건너 아랍세계로 들어갈 참이었다. 그 상상을 하노라니 잠자리 추위도 견딜 만했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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