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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우직할 때는 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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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우직할 때는 우직하자

입력
2007.04.24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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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함이 강할 때가 있다. 단순하게 쭉 내뻗는 주먹의 힘, 재치 넘치는 말보다 어눌한 한마디나 침묵이 갖는 진실성. 영화도 그렇다. 현란한 수사, 치밀하게 계산,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재주가 가슴까지 깊이 찌르는 것은 아니다.

<아들> (5월3일 개봉)을 보면 두 가지 의문이 고개를 내민다. ‘굳이 말이 필요할까. 그리고 반전은 왜.’ 영화가 가야 할 길은 단순하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란 순수에 매달린다.

<아들> 은 그것을 위해 살인을 저질러 무기수로 복역중인 서른 아홉 살의 이강식(차승원)이 열 여덟 살이 된 아들 준석(류덕환)을 15년 만에 만나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10년전 국내외 TV상을 휩쓴 김종홍의 명작드라마 <길 위의 날들> 이 꼭 이랬다. 때문에 <아들> 이 <길 위의 날들> 과 겹쳐지는 것은 숙명이며, 비교기준 역시 먼저 세상 밖으로 나온 <길 위의 날들> 의 주인공 순우의 모습에 맞춰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아들> 의 아버지는 참 친절하다. 무기수인 자신의 처지, 교도소에서의 상활, 얼굴도 모르는 아들을 만나야 하는 설레임과 두려움을 빠짐없이 말(독백)한다. 아버지를 만난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답답함도 답답함이지만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를 지켜봐야 하는 관객을 위한 배려다.

그런데 어쩌나. 그게 도리어 분위기와 감정을 깨는 듯하니. 첫 만남의 순간, 밥이 넘어가지 않는 두 사람, 눈이 무섭게 생겼다는 아들의 말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울면서 자신의 눈을 씻는 아버지, 함께 밤길을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

이런 장면에 무슨 말이 필요하랴. 강식이 “아픕니다” “슬픕니다” “내 눈이 싫습니다”라고 할 때, 그 아픔과 슬픔의 실체는 줄어들어 관객의 가슴까지 밀고 들어올 힘을 잃고 만다. <길 위의 날들> 의 뭉뚝한 순우라고 그 마음이 다를까마는 그는 “오늘은 아버지와 자라”는 할머니의 호된 꾸중을 듣고 곁에 누운 아들을 외면하고는 말없이 벽만 본다. 그의 침묵이 주는 아픔과 안타까움이 강식의 말보다 훨씬 깊다.

<아들> 은 게다가 기막힌 깜짝쇼(반전)를 마련했다. 지금까지의 관계와 감정을 모두 전복시킬 만큼 가파른, 산길을 구비구비 달리다 갑자기 기계로 깎아놓은 낭떠러지 같은. 그것이 <길 위의 날들> 의 같은 길을 되돌아오는 것보다 짜릿할 수도, 스릴 넘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지금까지의 순진한 감정, 시간이 누군가에 장난에 의해 망가졌다는 느낌이 강하다.

장진은 재기가 넘치는 감독이다. 그것이 그의 영화를 빼어나게 만들기도 하고, 흐트리기도 한다. 이런 감독이 충무로에는 몇 더 있다. 그들에게 <아들> 이 아무리 말이 능해도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우직해야 할 때 우직스럽고, 함부로 이야기를 구겨 접지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재치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이대현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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