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 인생] 편집의 아름다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 인생] 편집의 아름다움

입력
2007.04.20 23:35
0 0

한밤중이다. 세상은 더없이 고요한데 문득 비가 내리는 듯하여 잠시 읽던 책을 덮었다. 리쩌허우의 <논어금독(論語今讀)> 과 진수의 <정사 삼국지(正史 三國志)> 를 앞쪽과 옆쪽에 펼쳐 두고 번갈아 읽는 중이었다. 베란다로 나가 살짝 커튼을 젖혀 보니 과연 눈앞에 습기가 가득하다. 내친 김에 아예 커튼을 해치우니 봄밤 비 내리는 경치가 사뭇 눈에 감긴다.

보름 전쯤인가. 창밖 목련 가지에 흰 빛이 도는 듯하더니 어느새 솜사탕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실이 흘러내리는 듯, 흰 갈대가 솟아오르는 듯 안개에 섞여 뿌리는 비로 천지가 온통 흐릿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 허공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목련꽃들 뿐이다. 눈 쌓인 듯, 서리 얹은 듯 꼭 미인의 살결 같다. 안평이 거닐었던 무릉 뒤뜰이 꼭 저러했으리라. 여름을 재촉하는 봄비가 야속하기만 하다.

처음 편집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것도 아마 이런 봄이었으리라. 거의 서른해 전이다. 어느 날 가친(家親)께서 무릎 꿇린 후 말씀을 내렸다. 집안에 ‘문자’를 아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할 터이니 부디 익히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손에 쥐어 주신 책이 <천자문> 과 <명심보감> 이다. 속을 들춰 보니 시쳇말로 악 소리가 절로 났다. 그 글자는 무척 복잡하여 형태를 좇기도 힘겨웠고, 그 뜻은 어려워 풀이를 보아도 요량하기 힘들었다. 괴발개발 간신히 쓰고 우물우물 입에 담아 외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그러다 한 해쯤 후에 우연히 <시(詩)> 의 세계와 접했다.

본래 문예를 좋아했던 나로서는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는 것 같았다. 뜻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편편이 배우기 즐겁고 구절구절이 읽기에 흥겨웠다. 이 멋진 책을 편집한 사람이 바로 공자(孔子)다. 전하는 노래 중 좋은 것을 가려 뽑아서 <시> 를 만든 것이다. 그의 제자들도 대단한 편집자들로서, 공자의 어록을 엮어 <논어> 를 지었다.

동양에서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본디 할 바이다. 지금 나는 이 오래된 길을 따라갈 뿐이다. 공자가 ‘사악함이 없는’ 시만 가렸듯이, 내 하는 일도 오직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장은수ㆍ민음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