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모두가 침묵하는 아이… '왕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모두가 침묵하는 아이… '왕따'

입력
2007.04.20 23:33
0 0

얀 데 장어르 지음ㆍ송소민 옮김 / 220쪽ㆍ이룸 발행ㆍ9,700원

‘왕따’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접근하면 존재의 죽음을 뜻한다. 저항할 힘 없는 아이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은 결국 한 개인에게서 삶의 용기를 빼앗는 무참한 짓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까.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에 대해 증언해줄 사람이 없었던 것만 봐도 친구 관계가 인격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심지어 룸메이트조차도 조씨를 잘 모른다고 했던 것은, 그의 이상 성격 탓이 가장 크지만 주변 사람들이 책임을 느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의 주인공인 변호사 피터르는 25년 만에 동창회에 나간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그는 막상 동창들을 만나자 ‘땅꼬마 왕재수’로 부르던 시히를 떠올린다. 두 학년이나 빨리 진급할 정도로 영특했지만 왜소하고 힘이 없어 늘 놀림의 대상이 됐던 아이,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순간에만 존재감을 나타낸 아이, 결국 졸업파티가 끝난 새벽 첫 기차에 치어 죽은 아이.

졸업파티가 있던 날 여자친구와 로맨틱한 기분에 빠져있던 피터르는 더없이 아름다운 하루를 위해, 파티에서 바지가 벗겨지는 수모를 당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시히를 보고도 외면한다. 그 뒤 어쩌면 시히를 구할 수 있었을 최후의 사람이라는 자책에 25년간 악몽을 꾼다.

반면 시히를 인형 취급하며 금지된 장난까지도 한 주범 엘리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독기어린 입놀림으로 호령한다. 자신의 죄를 모른 채 뻔뻔스런 농담을 자랑하는 스티프터르 선생님도 마침 그 자리에 있다.

그러나 피터르가 동창회에 나오기 전까지 원래부터 시히는 없던 사람이었다는 듯 입에 올리기 꺼려한 그들은 통렬한 복수를 당한다.

시히를 급우에 대한 반사회적 태도로 기소한 25년 전 모의재판, 이미 무시당하던 아이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 그날, 자신의 지식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스티프터르 선생님은 피터르에게 적합한 변호를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시히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그때 시히를 제대로 변호하지 못한 무기력한 어린 변호사 피터르가 25년 뒤 진짜 변호사가 돼 나타나 엘리와 스티프터르 선생님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자신을 포함해 암묵적 동조자였던 반 아이들 모두에게도.

책은 섣부른 화해를 청하지 않는다. 25년 후 어른이 돼 돌아본 학창 시절의 행동을 단지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부당한 대우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에 괴로워한 또 다른 피해자를 위로하기도 한다.

‘왕따’ 문제에 대한 침착하고 진지한 성찰이 돋보인다. 부조리한 구조를 개선할 책임이 있는 교사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시히는 어디에나 있고 앞으로도 있을 피해자다. 우리 또한 중년이 된 이들처럼 고백할 게 있지 않을까. “그때 우리가 한 마디 했어야 하는데”라고 말이다.

우리 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다. 쌍꺼풀이 짙고 입술이 빨갛던,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걷고 말끝마다 ‘어머’를 연발해 놀림 당하던 남자아이가….

채지은기자 c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