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 문학과지성사피 흘린 옛사랑 부끄러운 우리
오늘은 4ㆍ19혁명 47주년이다. 이 날이면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던 격정이 되살아나고,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최인훈의 소설 ‘광장’ 서문)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삶은 격정과 보람으로만 지속되지 않는다. 4ㆍ19에 떠오르는 또 다른 언어는 김광규(67)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다.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인용이 길어졌지만, 더없이 평이하고 투명한 김광규의 시는 그만큼 부연한다는 것이 부질없다. 4ㆍ19세대인 그는 자신의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1979)에 실린 이 시에서 격정도 보람도 아닌, 역사 앞에 부끄러운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를>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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