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한국의 한 농촌 총각에게 시집 온 베트남 여성 P(21)씨는 4달 만에 버림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몸이 약해 임신하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우리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아이도 못 낳는 아픈 애를 데리고 살 수 없다”며 P씨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친정에 대한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결혼한 P씨는“계속 살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시댁 식구들은 시부모님과 남편에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P씨는 결국“종으로 살수 없다”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농어촌에서‘물건너온 며느리’가더이상 낯설지 않게 됐지만새풍속의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남편이나 가족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가정 폭력의 희생이 되기 일쑤다. 빈곤이나 자녀 교육문제로 가슴앓이를 하다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도네시아인 M(27)씨는 남편의 폭력 때문에‘이주여성을 위한 쉼터’에 피신해 살고 있다. M씨는 7년 전인도네시아에서 원양어선 선원이었던 남편과 만나 두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남편이 사업 실패후매일 술을마시며 행패를 부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6월 카자흐스탄에서 농촌으로 시집온K(31)씨도“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의 매일 폭행 당해 결혼 생활 자체가 지옥이었다”고 흐느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여성 이혼 상담자 10명 중 4명꼴(36%)로 남편에게 맞은적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가정 폭력이 심각하다.
필리핀인 G(23·필리핀)씨는 돈 한푼제대로 만져보지 못하는 여종이나 다름없다. 친정에 대한 경제적 지원약속도 휴지가된지오래다. 그는“남편이 매달 300달러를 필리핀 부모에게보내주는 조건으로 결혼했는데현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순형 서울대(아동가족학과)교수팀이 지난해 7, 8월 전국 농촌지역 베트남 중국 필리핀 출신 여성결혼 이민자 16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10%가 생활비나 용돈을 받지 못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 전남 나주 필리핀인 조나씨/ 국제결혼 성공사례
필리핀에서 빵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조나 히스터(26)씨는 지난해 2월 전남 나주로 시집왔다. 남편은 자신보다 열네 살 많은 서창재(40)씨. 전형적인 농가에서 힘든 농삿일을 하고 있지만 조나씨는 어느새 어엿한 맏며느리로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시어머니와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낳은 뒤에는 시어머니로부터 생전에 누려보지 못한 호강까지 받고 있다.
조나씨와 서씨를 연결해준 것은 조나씨의 사촌 언니이자 손아래 동서인 로나(28)씨였다. 2004년 1월 서창재씨의 친동생 창열(38)씨와 결혼한 로나씨가 노총각이던 시아주버니 창재씨에게 “성격 좋고 착한 동생이 있다”며 중매를 섰고, 조나씨는 맞선 1주일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두 아들 내외는 결혼 이후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도 아낙네의 살림살이를 배우며 가족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시어머니인 이전금(75)씨는 “입을 쩍 벌리고 김치를 길게 찢어 먹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한국인 며느리로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고 말했다.
조나씨 부부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은 가족의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서로 이해해주는 마음자세가 중요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매일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한국말도 배우고 고민도 털어놓는다”고 말했다.
물론 한 지붕 밑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두 자매가 서로 큰 힘이 됐다. 조나씨는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마다 사촌언니와 의논하고, 서로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덧붙였다.
이들 부부는 나주시가 결혼이민자 가족 구성원들을 초청해 실시하는 가족관계 향상 및 가족체험 프로그램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조나씨는 “군청에서 실시하는 다양한 교육과 상담을 받고 이민자들과 만나서 서로 대화하다 보면 도움이 됐다”며 “아이가 좀 크면 결혼이민자 가정 자녀만을 대상으로 가정방문 학습지교육과 양육상담도 받아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 국제결혼 급증…정부대책은?
새 천년을 전후로 국제결혼, 특히 동아시아인 여성과의 결혼이 급증하면서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정책이 경제적 지원에 집중하고 있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국제결혼으로 유입되는 외국인을 한국사회에 통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정책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부는 결혼 이민자 가정의 실태 파악을 통해 2005년 8월 체류불안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둔 1차지원대책을 낸 데 이어 그 해 11월에는 생활상의 지원에 중점을 둔 2차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법무부는 배우자의 귀책사유로 이혼했더라도 국내에서 2년 이상 거주한 경우 영주자격을 주고 별도의 허가 절차 없이 자유로운 취업도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개정해 국적을 취득하기 전이라도 결혼 이민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했고 지난해부터는 결혼 여성의 출신국가별 네트워크를 구축해 원활한 정보 교환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정책은 단편적이고 문제해결 중심의 현상 대응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여성 결혼이민자 가족을 사회구성원으로 통합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 결혼 이민자 정책의 근간이 될 법무부의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법무부 관계자는 “법이 통과되면 5년마다 마련되는 기본계획에 따라 부처별로 연도별 시행계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그때 가야 좀 더 체계적인 대책 마련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체계적인 정착지원 프로그램은 아직 시도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성가족부와 문화부, 지자체 주관으로 한국어교육, 부부교육 및 문화체험 등도 실시하고 있지만 아직은 시범사업 수준이고 전체 여성 결혼이민자 규모에 비해서도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결혼이민자의 초기 정착지원을 넘어서 이들이 ‘2등 국민’이 아닌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잡게 해줄 장기적 관점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회에는 결혼이민자 가정을 위한 다문화교육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한 ‘이주민가족의 보호 및 지원 법안’‘혼혈인가족 지원에 관한 법률안’등이 발의돼 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 선진국의 국제결혼 사례/ 美는 同化型에서 다문화주의형으로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의 결혼 이민은 결혼중개업체를 통하는 한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만 정부에 이민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는 마찬가지이다. 선진국의 사회통합 유형은 동화형, 다문화주의형, 차별배제형 등 3개로 구분할 수 있다.
동화형은 이민자가 출신국의 언어, 문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민국의 주류와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프랑스, 영국과 1960년대까지의 미국이 이에 속한다. 이민국의 정부는 이민자들이 자국의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정규학교 진학을 적극 지원해 동화가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한다.
다문화주의형은 이민자가 그들만의 문화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인정하고 장려한다. 주류사회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공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60년대 이후 미국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종교에 대한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인정해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예방하고자 한다.
차별배제형은 이민자에 대한 수용을 거부해 원치 않는 이민자의 정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것이다. 예전의 우리나라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단순노동 업종에 종사하는 생산기능직 노동자를 특정 영역에서만 받아들이고 사회적, 정치적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인 유형이다. 독일 등에서 60년대까지 유지됐지만 경제 규모의 전지구화로 인해 이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현재 거의 사라졌다.
최영윤 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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