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발행ㆍ1권 232쪽 2권 236쪽ㆍ각권 1만원
전화에서 “장금도씨는 벌써 돌아가신 언니”라고 말했던 할머니가 군산극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나이에 쉽게 입을 수 없는 땡땡이 블라우스에 가슴이 뛴 사내는 다방에 마주 앉은 뒤 물컵을 밀 때 살짝 굽혀지는 할머니 손목의 곡선을 보고는 대뜸 말을 꺼냈다.
“출연자 중에 선생님 말고도 ‘채 맞은 생짜’(제대로 학습한 기생)가 있습니다.” 당신의 젊은 날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문용어로 들이민 것이다. 50년간 묻고 살았던 과거를 낯선 사내에게 들킨 할머니는 “아따, 애기들 깨것소”라며 손을 저었다.
장금도(79) 할머니는 12세에 권번에 입적한 뒤 인력거 두 대를 보내야 춤추러 나올 만큼 대단한 예기(藝妓)로 전북 일대에서 명성을 누렸지만, 열살 배기 아들이 친구의 놀림을 받고 울고 들어온 스물 아홉에 춤을 접었다.
기생 태가 날까 늘 양장을 입고 다녔던 장 할머니는 이후 아들, 며느리에게 들킬까 온천 간다 둘러대고 서울 무대 나들이를 했다. 2005년 ‘전무후무’ 공연 마지막 날, 어머니의 춤을 처음 본 아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기생 춤꾼 어머니를 부정했던 아들과 50년 만에 화해한 것이다.
장금도 할머니, 그리고 그의 민살풀이춤(수건없이 추는 살풀이춤)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이 이 책의 저자이자 전통예술 기획, 연출가 진옥섭(43)씨다.
연극을 하다 탈춤을 통해 전통과 춤에 빠져든 진씨는 기별 없이 벌어지는 굿판이나 춤판 때문에 안달하다 결국 직접 노름마치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노름마치. 남사당패의 은어로, 놀음(노름)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뜻한다.
진씨는 초야에 묻혀있는 기생, 무당, 광대, 한량들을 찾아 다녔고 노인정, 다방, 시장 국밥집에 마주앉아 그들과 담판을 지었다. 흥행이 목적인 공연은 안한다고 몇 달을 고개 젓던 창무극 <심청전> 의 대가 공옥진에게는 과거 그와 3년 여 짧은 사랑을 나눴던 가수 남인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 을 들려줘 마음을 움직였다. 울며> 심청전>
처음 춤을 청했을 때 “갈 때가 다된 늙은이가 뭘 한단 말인가”라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마지막 동래 한량 문장원을 다시 찾아 갈 때는 추풍의 낙엽이 될까 추풍령을 피하고, 급제라는 경사스러운 소리를 듣기 위해 문경을 거친 옛 선비들처럼 추풍령 대신 이화령을 넘어 문경을 거쳐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들었던 우리의 춤과 노래들, 예인과 그들의 삶이 다시 꽃으로 피어났다. 신 내린 여자하고는 살 수 없다며 신랑이 결혼 사진 반 쪽을 떼간 뒤 반쪽 남은 결혼 사진을 간직한 채 살아온 무당 한부전, 칠순이 넘어서도 심 봉사 연기로 전국을 유랑하는 토종 광대 강준섭, 전국을 떠도는 유랑극장집 아들로 태어나 하루에 1,000바퀴씩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던 채상소고춤의 김운태….
문화재 지정에서 소외받고,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유로 지난 세월을 가슴 속에 묻어뒀던 이들은 저자가 만든 무대를 통해 그들의 인생을 토해냈다.
20년간 발품을 팔아 건져올린 열 여덟 예인의 사연은 저마다 기구하고 애절하다. 그들의 삶이, 춤이, 노래가 더욱 절절한 것은 관객의 마음으로 예인들을 갈구해온 저자의 진심과 그들로부터 고스란히 전해 받은 생생히 살아있는 입말, 그리고 가수 장사익씨가 추천말에서 쓴 것처럼 ‘한바탕 농익은 춤사위’ 같은 글이 있기 때문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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