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50대 조기 실직자의 정신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 뿐만 아니라 가정이 엉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심리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일상 생활에서 실직으로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배우자 사망, 가족의 사망, 이혼, 별거에 이어 다섯번째로 높다. 실직을 비관한 가장의 자살과 가정 폭력 사건은 이제 뉴스 거리도 안 될 정도다. 실직 스트레스를 슬기롭게 헤쳐나간 사람과 여전히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통해 대처 요령을 살펴본다.
“웃으면서 취업 준비 하세요.”
노동부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는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 구직자를 대상으로 웃음치료 특강을 하고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돼 찡그리기 십상인 구직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 자신감과 삶의 활력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센터는 지난해부터 한국웃음센터와 협약을 맺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4,000명의 구직자들이 참가해 맘껏 박수치고 웃으며 구직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
웃음치료 특강에서 참가자는 90분 동안 아무 생각없이, 그냥, 무작정, 크고 신나게 웃기만 하면 된다. 강사는 웃음센터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교육 과정을 이수한 사람이 맡는다. 강연은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마주보고 무작정 크게 웃기 ▦박수를 치며 신나게 웃기(박장대소) ▦강사 웃음 따라하기 등 웃음으로 시작해 웃음으로 끝난다.
특강에는 구직자를 비롯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1회 강연에 100여명이 참여하는데 80명 이상이 40대 이상이다. 고령자들이 젊은 층에 비해 실직과 구직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특강에 대한 반응은 대단히 좋다. “오랜만에 맘껏 웃어 너무 개운했다” “또 듣고 싶다” “살아가는 데 낙이 없었는데 제대로 살고픈 의욕이 생겼다”는 등 한결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지난 달에 특강을 들은 박성조(49ㆍ가명)씨는 “많은 취업 특강을 들었지만 웃음특강처럼 가슴 시원한 적은 처음이었다”며 “실업자 신세라며 늘 어깨 처진 채 비관적이었는데 삶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두 번 이상 특강을 듣는 사람도 많다.
송영숙 취업지원 팀장은 “몇 차례 취업에 실패한 구직자들의 가장 큰 적은 자신감과 의욕 상실”이라며 “한바탕 큰 웃음은 구직자들에게 약해진 자신감을 키워주는 보약”이라고 말했다.
웃음치료 특강은 현재 서울종합고용지원센터와 관악종합고용지원센터(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 두 곳에서만 무료로 실시하고 있다.
▲김영수씨의 실직 스트레스 대처법
1. 구직자는 낙오자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를 찾아가는 모험가라고 생각하자
2. 세상엔 분명히 내가 할 일이 있다. 절대로 자기비하는 말자.
3. 가족에게 화 내지 말자. 누구보다 힘든 사람은 주변에서 지켜보는 가족이다.
4. 등산 산책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몸이 망가지면 정신도 망가진다.
5. 정말로 힘들 땐 무조건 정신과에 가자. 정신과는 정상인도 갈 수 있는 곳이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김영수씨 "늪에서 건진 내 인생"
김영수(47)씨는 운영하던 회사가 망한 지 무려 9년 만인 올 2월에서야 직장을 구했다. 심한 마음 고생을 극복하고 당당히 일자리를 잡은 그는 “그 동안 많이 아팠다. 많이 아팠기에 앞으로 더욱 열심히 살겠다”며 활짝 웃었다.
김씨는 건강기기를 수입해서 파는 업체를 운영하던 중 외환위기의 여파로 자금난에 시달리다 1998년 회사 문을 닫았다. 건강 관련 업종의 전문가들에게 공짜 해외연수도 시켜주는 등 떵떵거리며 살던 ‘김 사장님’에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전 재산을 탕진한 그는 처남이 마련해 준 월셋방에서 ‘소주로 밤을 지새며’ 살았다.
재기를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딛고 일어설 종자돈이 없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초등학생 두 딸과 아내가 있는 가정의 생활비 대기에도 빠듯했다. 취업을 하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지만 지원한 회사들로부터 퇴짜 맞기 일쑤였다. 몸에 밴 ‘사장님’ 기질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가의 도움으로 근근이 가정을 꾸려간 그는 2000년부터 ‘심한 속앓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신과 병원을 찾아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 회사의 도산과 잇단 재취업 실패에 따른 충격 탓이었다. 강도가 심해지는 아내의 푸념도 한몫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삶을 포기하고픈 유혹에 시달렸다.
그는 실업자 시절에 잘 한 일로 두 가지를 꼽았다. 정신적으로 힘들고 지쳤을 때 정신과를 찾은 것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있는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에 등록해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다.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 하던 그는 지난해 여름 친구의 소개로 재취업지원센터에 들렀다.
막노동과 친구 사업을 도우며 고단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그 곳은 “눈이 확 뒤집힐 만한 신세계”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며 “나만 힘든 게 아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구직자들과 대화를 하며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취업 상담원의 도움으로 ‘나도 이력서에 쓸 게 있다’는 것과 ‘세상엔 나보다 힘든 사람이 훨씬 많다’는 뻔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센터 등록 뒤 건강기기 관련 회사 두 곳에 이력서를 내 두 번째 지원한 기업에 연봉 5,000만원의 팀장급으로 들어갔다. 회사가 도산한 뒤에도 건강기기 업종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은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는 물론 더 이상 정신과에 다니지 않는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박모씨 "늪에서 구해주오"
중견기업의 관리 파트 부장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초에 정리해고 당한 박모(48)씨는 몇 개월 전부터 ‘외출 울렁증’에 시달리고 있다. 봄 꽃이 아우성을 치는 요즘이지만 그냥 집에 있는 게 마음 편하다. 약속하고 친구를 만난 것도 지난해 가을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기껏 슬리퍼를 신고 나간다는 곳이 동네 슈퍼마켓이 고작이다.
퇴직 초기엔 구조조정을 당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재취업을 위해 노크했던 몇몇 회사로부터 퇴짜를 맞은 뒤로는 부쩍 자신감을 잃었고 밖에 나가는 것도 꺼려졌다.
박씨가 ‘은둔형 외톨이’에서 잠시 벗어날 때도 있다. 방에서 인터넷을 하다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 정보를 만나면 의욕에 넘쳐 휘파람을 휘휘 분다. 컴퓨터 파일 속에 잠자고 있는 이력서도 다시 클릭해 손질한다.
지원 회사에 대한 각종 정보를 찾느라 분주해 지기도 한다. 그러나 휘파람도 잠시, 하루 이틀이 지나도 지원한 회사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박씨의 어깨는 또 다시 쪼그라든다. 의욕에 넘쳤다가 다시 의기소침해지기를 한 달에 평균 두 번은 반복한다. 그럴수록 박씨의 외출 울렁증은 더욱 깊어만 간다.
1월 어느날 오후, 박씨의 상담을 맡고 있던 노사공동재취업지원센터의 한 상담원은 박씨로부터 “혀 꼬부라진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여기 한강이다. 인생 헛되게 살았다.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는 박씨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진한 알코올 냄새가 전해졌다. 무려 1시간을 넘게 상담원이 전화로 설득한 끝에 술 취한 박씨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 상담원은 “당시엔 박씨가 정말 어떻게 되는지 알고 무척 놀랐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40,50대 조기 퇴직자들이 의욕을 잃고 방황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상실감 때문이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날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자기 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박씨는 아내와 두 아이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는 박씨가 안방을 지키는 날이 길어지면서 좀체 말을 걸지 않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은 공부를 핑계로 아빠를 멀리 한다.
박씨는 “일도 잘 안 풀리고 낮에 혼자 집에 있다 보면 처량한 내 신세에 눈물도 많이 난다”며 “친구들도 만나기 싫고 요즘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늪에서 헤어나갈지 막막하기만 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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