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라는 외침이 유치원에서 배우는 첫 노래일 만큼 유명인의 삶을 동경하는 이는 많다. 하지만 진짜로 TV에 등장하는 모델이 될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게 평범한 우리네 생각이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대학동창이 TV광고에 등장했다! ‘아니, 저 회사는 왜 애 딸린 아줌마를 모델로 쓴 거야? 도대체 저 친구는 어떻게 모델로 뽑힌 거지?’ 부러움 반 호기심 반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데 문득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래, 평범함은 우리의 무기. 일반인 모델 전성시대 아닌가.
나른한 토요일 오후, 서울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엄마, 아이스크림 사 줄 거야?” “그래, 오늘 예쁘게 잘 찍으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인터넷도 쓰게 해 줄게.” 촬영에 지친 아이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인터넷 사용 1시간 연장’이라는 ‘빅딜 카드’를 제시할 즈음, 아빠는 잠시 틈을 내 휴대전화를 들고 비즈니스에 여념이 없다.
과일 유통업체 돌(Dole) 코리아의 ‘건강한 돌(Dole) 가족모델 선발대회’ 3월 모델로 뽑힌 백영곤(37ㆍ무역업)씨 가족의 화보 촬영 현장이다.
가족모델 선발대회는 돌 코리아가 6월까지 매월 한 가족씩 선발, 광고모델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백영곤-강은정(32) 부부와 세 자녀, 권희(7) 환희(5) 훈희(2)는 그 첫 주인공이다. 응모한 180여 가족중 선발된 이들은 모델의 꿈을 이룬 것은 물론 괌 4박5일의 여행권을 부상으로 거머쥐었다.
광고모델이 되는 색다른 체험이라고는 해도 몇 시간에 걸친 촬영이 아이들에게 쉬울 리 없다. 한 시간 남짓 걸린 첫번째 촬영에 지칠 대로 지쳐 칭얼대던 큰 아들 권희는 결국 강씨가 ‘인터넷 무한 사용’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내민 뒤에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남편 백씨는 오늘로 예정돼 있던 일본 출장을 월요일로 연기해가면서까지 촬영에 나선 터라 업무 관련 통화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다섯 사람이 두번째 촬영에 들어가기 위해 잡아먹은 시간만 해도 30여분. 그래도 부부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는 강씨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셈이다.
“어휴, 모델이라니, 꿈도 꾸지 못했죠. 잘 되면 부상으로 과일이나 한 박스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응모한 거였어요. 아이들이 힘들어도 재미있어 하는 걸 보니 행사에 참여하길 참 잘했어요.”
남편 백씨도 한 마디 거든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돼 한 집에 살아도 세 아이를 한꺼번에 보는 일조차 쉽지 않아요. 오늘은 셋 다 즐거워하는 모습을 한 자리에서 보니 정말 좋네요.”
어쩌면 아이들은 핑계다. 9년차 주부 강씨는 “결혼식 이후 처음” 전문가가 해주는 메이크업을 40분에 걸쳐 받았다. “아이들 사진을 모으느라 PC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할 정도”라는 남편 백씨는 전문가가 찍어 주는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갖게 된 것에 뿌듯해 했다.
최근 일반인 모델을 광고에 활용하는 기업이 늘면서 백씨 가족처럼 색다른 체험을 하는 ‘보통 사람’도 꽤 많아지고 있다. 단발성 광고 출연은 물론 일반인이 한 기업의 메인 광고 모델로 데뷔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최종 선발된 한화건설 꿈에그린 아파트의 일반인 모델은 현재 호주에서 광고촬영 중이다. 지난 3년간 탤런트 김현주를 전속 광고 모델로 기용했던 이 업체는 그 뒤를 잇는 차세대 얼굴로 과감히 일반인 응모자를 선택했다.
일반인 모델이 뜨는 이유는 고객에게 상품과 더불어 꿈을 파는 기업의 감성마케팅, 일명 ‘드림 마케팅(Dream Marketing)’이 유행하는 까닭이다. 모델료를 줄이는 것은 물론 선발대회를 통해 소비자와의 접점은 늘릴 수 있다.
일반인 모델 특유의 신선미와 친근감도 강점이다. 블로그와 UCC(User Created Contentsㆍ사용자 제작 콘텐트) 등을 통해 적극적인 자기 표현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 직업 모델 뺨치게 근사한 광고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도 한 이유다. 결국 일반인 모델 선발 마케팅은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윈윈(win-win) 전략인 셈이다.
백씨 가족은 드디어 촬영 3시간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스튜디오를 마당 삼아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한 데 모으느라 ‘목말 태우기’ 등 육체노동까지 수행하며 진땀을 흘렸던 백씨는 “가셔도 됩니다”라는 사진작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짐을 챙겨 문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광고촬영 일이 어른이라고 쉬웠을 리 없다. 딸 환희는 잔뜩 들뜬 채 “엄마, 그럼 약속한대로 집에 가서 장난감 인형 사주는 거야?” 했다. 엄마, 아빠가 그저 장난감 인형이 아닌 특별한 추억을 남겨 주기 위해 이만큼 애썼다는 걸 먼 훗날 이 아이는 기억할 수 있을까.
아이의 물음에 고개를 크게 끄떡여 준 강씨는 콧잔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앞으로도 (모델 콘테스트에) 꾸준히 응모해야 겠어요.”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 '일반인 모델' 왜 인기 끄나
누구나 한번쯤 광고 모델을 꿈꾼다. TV나 신문, 잡지 등 매체 광고에 얼굴을 내미는 ‘유사 연예인’ 체험도 색다른 즐거움이고 모델료도 짭짤하게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마침 소비자와의 접점을 최대한 끌어내려는 ‘드림 마케팅’이 인기를 끌면서 일반인 모델을 선발하는 기업도 급증하고 있다. 자기 표현에 적극적인 사람들에게 모델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한화건설은 최근 아파트 브랜드 ‘꿈에그린’ 모델 선발대회를 열었다. 참가 자격은 25~35세 대한민국 여성, 다시 말해 일반인이었다.
신선한 모델을 찾는다는 취지로 기획된 이 행사에는 단 9일간 무려 1,510명의 지원자가 몰려 일반인 모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엿보게 했다. 행사를 주관한 광고대행사 한컴의 최재호 차장은 “모집 기간이 짧아서 많아야 500명쯤 응모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서류심사와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지난 3일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본선에서는 김정은(28), 배성희(24)씨가 공동 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김씨는 그래픽디자인 회사 AE였고 배씨는 대학원 진학 준비생이었다.
일반인 모델 선발대회에 쏟아지는 관심은 미디어 노출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없어졌다는 것이 첫번째 배경이다.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김재휘 교수는 “디지털 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가 확산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대중이 자신의 모습이 공개되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의미다.
공개석상에 나서기를 꺼리던 과거의 인식이 바뀌고 오히려 미디어 노출을 ‘기회’로 보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분석한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연습이 충분히 돼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이 기존 소비자와 유사한 이들을 내세움으로써 광고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추세도 일반인 모델 선발대회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겹치기 출연으로 유명 연예인 모델의 광고 효과가 점점 떨어지는데다 소비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일반인의 말을 더 현실성 있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물론 맹점은 있다. 동국대 경영학과 여준상 교수는 “기업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일반인 모델을 쏟아낸다면 그들의 장점인 신선함이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일반인 모델에 대한 선호도와 선망이 합쳐지면서 인터넷상에는 모델의 꿈을 좇는 주부들의 공식 카페(주부모델캐스팅ㆍhttp://cafe.daum.net/me7me)가 생길 만큼 ‘모델 워너비(wannabeㆍ특정 계층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는 급속도로 늘고 있는 추세다. 덕분에 기업 모델 콘테스트를 거쳐 실제 모델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이들은 일반인 모델의 성공 비결을 ‘적극성’ 이라고 말한다.
2개월 전 한 인터넷 쇼핑몰 모델 선발대회에서 수상한 윤미선(28)씨는 현재 홈쇼핑 모델로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는 윤씨는 “유아 모델인 딸과 우연히 잡지에 함께 등장한 뒤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이후 섭외 연락을 기다리는 데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오디션을 찾아 다녔더니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고 비결을 밝혔다.
적극성과 더불어 모델 선발 업체의 행사 취지나 브랜드와 상품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필수다.
‘건강한 돌(Dole) 가족모델 선발대회’를 기획한 마케팅팀 나호섭 차장은 “행사의 취지를 잘 이해하며 과일 브랜드의 건강하고 신선한 이미지에 어울리고 소비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친근감을 갖췄는지가 선발 기준이었다”고 말했다.
지원서 접수(5월3일 마감)가 한창인 ‘내추럴뷰티 선발대회 2007’을 여는 화장품업체 더페이스샵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홍보팀 김미연 부장은 “흔한 미인대회와는 다르다“며 “자연주의 콘셉트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연중 마케팅 캠페인의 일부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말 그대로 자연미인 선발이라는 기업의 행사 취지에 맞는 인물이 뽑힐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팁 하나. 일반인 모델의 관문을 뚫고 전문 모델로 점프하고 싶은 사람이 새겨 들어야 할 충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꾸준함’이다.
수많은 UCC스타가 등장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듯 광고로 데뷔한 일반인 모델도 작은 역할이라도 꾸준히 맡아야 더 큰 무대로 옮겨갈 수 있다. 한국싸이버대 컴퓨터정보통신학부 곽동수 교수는 “인터넷 세계에서도 양질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할 때 성공할 수 있듯 일반인 스타도 꾸준히 자신을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 모델 콘테스트의 어제와 오늘
굳이 ‘일반인 모델’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그렇지 사실 기업이 주최하는 모델 콘테스트가 새삼 새로운 마케팅이벤트는 아니다.
1977~81년까지 롯데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미스 롯데’ 선발대회는 대표적인 자사 모델 선발대회다.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등 계열사 광고를 위해 필요한 참신한 모델을 뽑기 위한 행사로 원미경, 명현숙, 안문숙 등 유명 방송인들이 바로 이 대회 출신이다.
이 대회가 폐지된 이후 87년부터는 롯데제과에서 전속모델을 뽑는 행사를 시작해 90년대 중반까지 이어갔다. 배우 이미연이 이 대회 1회 수상자다. 인터넷으로 응모하는 요즘과 달리 접수를 위해 지방에서 직접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 등 지원 과정이 번거롭고 선발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 것이 1차적인 대회 폐지의 배경이다.
90년대의 대표적인 기업 모델 콘테스트는 미스 빙그레다. 92년 1회를 시작으로 2004년 10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 이 대회 출신의 스타는 탤런트 한효주, 김소연, 김민정 등이다.
이 같은 80~90년대 기업모델대회는 선발과정이 복잡해 상대적으로 연예학원 수강생들이 입상에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기업의 참신한 얼굴을 찾는 본래의 목적보다 연예인 등용문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단순히 외모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선발방식에도 각종 아이디어가 동원되고 있다.지원자가 직접 출연하고 제작한 동영상 UCC 중 아이디어가 뛰어난 경우를 골라 이를 그대로 광고로 제작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물론 과거의 자사모델 대회와 지금의 일반인 모델 선발 대회의 공통점이자 흔히 보는 미인대회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도 있다. 1970년대든, 2000년대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모델 대회에는 수영복 심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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