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상은 누구인가…
‘25시의 사나이’ ‘컴퓨터 달린 불도저’ ‘장기자’ ‘왕초’……. 올해로 타계한 지 30년이 되는 한국일보 창간 발행인 백상 장기영(1916~1977)에게는 수많은 별명이 따라붙었다.
언젠가 스스로를 일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뼈는 금융인이요, 몸은 체육인이며, 피는 언론인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나의 얼굴이다.”
<백인백상> (1983) <속 백인백상> (1985), <속속 백인백상> (1991) <후 백인백상> (2002)은 그런 그의 삶에 대한 편편(片片)의 백서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각계 인사 300명이 필자로 참여해 거침 없었던 61세의 생을 증언해주는 이 책들 속에서 백상은 여전히 펄펄 살아 숨쉰다. 후> 속속> 속> 백인백상>
한국은행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한국은행 부총재, 초대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에 올랐고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상업지를 창간,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저널리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 문화 제일주의와 여성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리버럴리스트이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 국회의원,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등 공인으로도 살았던 이. ‘성공은 부채요 실패는 자산이다’ 등의 숱한 명구를 남긴 위대한 카피라이터이자 수 십 년을 앞서 봤던 예지자.
백상 일신의 드라마틱한 성공담은 개인적 차원과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근대화라는 숨가쁜 시대를 달려온 한국 사회의 성취를 이루는 씨앗이 됐다. 거센 도전에 직면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다시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다.
그는 실로 21세기를 먼저 살다간 20세기 한국인의 커다란 초상이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11일 고(故) 백상(百想) 장기영 한국일보 사주의 타계 30주기를 맞는다. 고인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로서 한국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언론 전문경영인이었고 ‘장 사장’보다는 기자들과 호흡하며 ‘왕초’‘장 기자’로 불리길 원했던 영원한 저널리스트였다.
고인과 함께 한 시대를 호흡했던 조세형 한국정학연구소 이사장,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 교수, 안병찬 르포르타주 저널리스트,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고인이 신문에 받쳤던 열정과 언론철학, 경영관, 한국 언론사에 끼친 영향,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왜 고인의 정신을 되새겨야 하는지를 짚어봤다.
좌담회는 장명수 한국일보 고문의 사회로 9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19층 석류실에서 진행됐다.
▲장명수 고문= 한국일보 가족들은 예나 지금이나 장기영 사주를 ‘왕초’로 부릅니다. 타계 30주기를 맞아 왕초에 대한 그리움이 새로워지고 있는데 그 분과 함께 했던 추억과 그 분의 철학을 말씀해 주세요.
▲조세형 이사장= 1963년 외신부장 시절 ‘80시간의 세계일주’를 했습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영화에서 딴 장 사주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얼마나 빨리 세계일주를 할 수 있는지를 한국일보가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세계일주를 마쳤을 때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됐지만 장 사주는‘영원한 저널리스트’입니다.
▲정진석 교수= 69년 기자협회보 기자로 3번 인터뷰를 해 그 분의 언론관을 듣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언론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전문경영인이 드물다는 점입니다. 광복 이후 언론 전문경영인을 꼽으라면 당연히 장기영 사장입니다. 그 분의 경영은 그냥 주판을 튀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때 항상 “모두가 경영인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편집권이 경영인에 속해있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100년 언론사에서 그 분 같이 ‘포괄적인 경영인’은 없습니다.
▲안병찬 저널리스트= 백상의 행태적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백상은 들었습니다. 듣는 전법을 썼습니다. 기자들을 호출해서 회유할 때도 소통방식에서 피드백을 중시했습니다. 둘째, 묻고 배우는 게이트 키퍼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정보 장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발로 뛰었습니다. 우선 현장에 가고 나중에 머리로 생각하라고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백상의 신문 경영은 한마디로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파리의 모습처럼 ‘부채살 리더십’이었습니다.
▲장=‘80시간의 세계일주’라는 표현을 만들었듯이 장 사주는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 분처럼 탁월한 언어 감각을 가진 분을 만나는 것은 기자에게 항상 자극이 됐습니다. 그런 분은 지금 다시 기자 생활을 해도 만나기 힘들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 맞습니다. 그 점이 한국일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문화면에 문화적인 것을 다룬 것은 한국일보가 처음이었습니다. 지금은 문화가 상식이고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그 때는 아니었습니다. 문화면 하면 한국일보를 뽑았죠. 다른 지면도 좋았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게 문화면이었습니다.
문단의 햇병아리였던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 “나 장아무갠데 같이 일합시다”라고 하던 목소리가 생생합니다. 군사정권 당시 내 눈에 비쳤던 장 사장은 거대한 바위였습니다. 바위이면서도 그 곳에 이끼처럼 부드러움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 사장이 있던 한국일보는 인재가 모이는 ‘양산박’이었습니다. 참으로 그 분은 열린 기업인이었고 언론인이었습니다.
▲정= 장 사주의 언어감각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발행인이 말을 이렇게 멋있게 하는 분을 처음 봤습니다. 신문 문장이 깨끗하고 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한국일보가 아침에 1면에 시를 한편씩 실었던 일 등은 장 사주의 언론 철학을 그대로 보여주었죠. 그 분은 문장가였습니다. 54년 미국을 여행하며 쓴 여행기를 읽어봐도 지금보다 문장이 더 짧고 간결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 1954년 한국일보가 창간됐습니다. 당시 한국일보는 상업주의를 표방하며 독자들이 원하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기사로 한국 언론사에 혜성처럼 나타났습니다. 한국일보와 장 사주가 한국 언론사에 끼친 영향을 말씀한다면.
▲정= 그 분이 말한 상업주의는 독자들에게 알릴 것을 제대로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문이 상업주의 신문이고 돈벌이만 하는 것이 상업주의가 아니라고 항상 강조했습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 신문이 자유경쟁 체제로 가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50년대 언론 풍토를 혁신하고 진보적인 분위기를 선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 시시때때로 한국일보에 대해서 여당지냐, 야당지냐라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구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장 사주?일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볼 때 한국일보는 야당지였습니다. 야당지라기보다도 ‘야당적 정신’을 가지고 만드는 신문이었습니다.
못쓰는 기사가 하나도 없는 뭐든지 다 쓸 수 있는 그런 신문이었습니다. 제3공화국 당시 장 사주는 항상 “나야 여러 이유로 정부에서 일하지만 신문은 쓰고 싶은 것은 다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장 사주의 정신이 한국일보에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장 사주는 신문의 자유주의 정신을 중시했습니다. 그 분은 “신문은 경우에 따라서 팔방미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분이 말한 팔방미인의 핵은 자유주의입니다. 그런 신문이 가장 좋은 신문이고, 상업주의 시대에 이길 수 있는 신문이라는 게 그 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장기영 사장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디어가 광고이고, 광고가 기사라는 것을 그 분은 강조했습니다. 미디어의 주인이 광고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진짜 광고를 열심히 했고 한 밤중에도 1단짜리 광고를 챙기라고 독려했습니다. 편집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광고를 혁신한 분이었죠. 광고국을 1층에 두고 24시간 불을 켜두었던 아이디어는 혁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장= 한국일보가 6월9일로 창간 53주년을 맞습니다. 후배들이 여전히 불편부당의 논조를 지키는 것을 보면서 혼자 감동할 때가 많습니다. 한국일보의 발전을 위한 고언을 부탁합니다.
▲조= 한국일보는 정파적 개념으로 볼 때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문이 그래야 합니다. 진취적인 판단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장 사주는 한국일보를 창간해서 진취적으로 끌어왔습니다. 한국일보는 지금까지 자유주의적이고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안= 한국일보는 중간점을 어떻게 찾느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지만, 한국일보를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는 분들이 많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장 사주가 살아계신다면 한국일보는 다양성 있는 신문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 미디어가 가지는 장점을 적극 활용해 많은 기획을 하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정치 지향적인 것도 크지만 문화면을 크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신문이 하지않는 다양성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원자핵이 끝없이 분열하는 것처럼 분산형 신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분야는 객관성을 가지고 보도하고 다른 분야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장 사주가 바라던 한국일보의 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정= 장 사주는 신문 발행을 오케스트라나 마찬가지로 보셨습니다.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온몸으로 열정을 보였고, 그 자체가 삶이라고 느꼈던 분이셨습니다. 글자 하나로 승부를 하며 한국일보와 함께 호흡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장 사주의 이런 정신을 되돌아 보면서 한국일보의 앞날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곡(哭) 장기영선생
1954년
한국일보 창간 직후의 어느 날
한국일보사엘 들렀더니
소사 차림의 한 사내가
너무나 열심히 실내 청소를 하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시무룩히 미소해 보여서
"참 충실한 소사지?"
내가 어느 기자에게 물으니
"아니다. 그가 장기영 사장이다"고 했다.
어찌 소사 노릇뿐이리오.
소사요 급사요 기자요 사장으로서
그의 심장의 피는 뛰고 뛰고 또 뛰고 있을 뿐이었다.
백상이라는 그의 아호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 가지로만 생각하고 사는 일을
그는 늘 백 가지로 생각하고
백 가지로 실천하고 살으셨으니까......
그리하여 그의 이 백상백천의 심장은
한 신문사의 틀을 넘어 벗어나서
이 나라의 체육을 세계에 앙양하는 길로,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이끄는 길로,
언제나 그 맨 앞에 달려가서
똑딱 똑딱 똑딱 뛰고만 있었다.
그러기에 이번 그의 육신의 죽엄을
나는 죽엄이라고는 도무지 생각지 않는다.
사람들 백 갑절로 뛰고 있던 이 심장이 가시적으로
똑딱똑딱 열심히 뛰고 있다가
저 하늘과 영원 속으로
범위를 아주 넓혀 옮겨서 들어선 것으로만 본다.
이 나라에 정신과 성의가 있는 날까지는
이 나라에 애국애족심이 있는 날까지는
그의 심장의 고동은
언제나 그 어디에 들어박혀
백(百) 갑절로 열심히 뛰고 있을 것이다.
미당 서정주(1977년 9월 13일자 1면 개재)
정리=박희정 기자 hjpark@hk.co.kr
■ 명사들이 돌아본 백상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 사업을 전폭적으로 후원해준:편집자 요약) 백상이 간 지 다섯 달 뒤, 우리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1977년 9월 15일 12시 20분, 표고 6,500m의 고소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선 고상돈 대원과 무전으로 통화할 때 나는 백상의 얼굴을 눈앞에 그렸다. 그리고 하산 길에 샹보체 경비행장에서 내 무릎에 쏟아지는 축전 뭉치 속에 나는 백상이 보낸 전문을 찾으려는 착각을 일으켰다 -김영도 전 대한산악연맹 회장
(취재 차에서는 취재 기자가 어른이라며 자신의 지프차 맨 앞 자리에 태워 한남동 나룻배가 뒤집힌 사건 현장에 나를 태우고 간: 편집자 요약) 장 사주는 독전의 사령관 자리에 서지 않았다. 한남동 화원에서 전화를 지켰다. 화원의 전화가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던 그때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발을 굴렀다. (중략) 나는 다시 없는 보조기자 한 사람을 거느렸던 셈이다. -김중배 전 MBC 사장
쉬지 않고 샘솟는 화두와 번득이는 재담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이끄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고, 빠른 두뇌 회전과 정확한 계산력, 빈틈없는 기획과 과감한 실천력은 문자 그대로 천수천안이었다. (중략) 그와 정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백상 생전의 웅지를 받들어 영생의 탑을 세우리라 굳게 믿는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1980년 서독 바덴바덴 IOC 총회장에서) 그가 그토록 신봉하고 실천했던 IOC정신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다는 미래에의 확신에 직결되고 있음을 프랑스 IOC위원 보몽 백작은 강조했다. “조 회장, 걱정 마시오. 한국이 승리할 것이오. 우리와 아프리카 대륙은 나의 친우 미스터 장을 위해 투표할 것이오.”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
선생이 지금도 내게 놀라운 것은 그는 기업가일 뿐 아니라 신문이 독자를 위해서 ‘읽을 거리’를 어떻게 관리해내야 하는가를 알던 지사적 문화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넉넉한 지원과 신뢰가 없었다면 그 다사다난한 시대에 아무 죄도 없는 기자들을 괴롭히며 어떻게 <장길산> 을 10년 동안이나 연재할 수 있었을까. -소설가 황석영 장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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