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주민투표 끝에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가 경주로 결정됐다. 하지만 진짜 숙제는 이제부터다. 우리나라는 고준위 방사능을 유출하는 '사용후 핵연료'에 대해선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은 상태다.
궁극적으로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은 수십 년 뒤 운영되겠지만, 중저준위 방폐장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돼 공론화가 시급한 상황이다. 사용후 핵연료 정책이 왜 시급하고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2회에 걸쳐 살펴본다.
2004년 원자력 관련 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원자력위원회는 중저준위 폐기물과 사용후 핵연료 분리정책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후 사용후 핵연료에 대한 정부 정책은 전무하다. 사용후 핵연료는 중저준위 폐기물보다 훨씬 심각한 고준위 방사능 물질을 말한다. 원전 내 임시저장소는 2016년 포화상태에 이른다.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황주호 교수는 “2016년 이후 사용후 핵연료를 중간저장소에 보관한다 쳐도 지금부터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지을지 논의해도 늦었다. 더욱이 영구처분장은 수십 년, 수십 조원이 걸리는 사업인데 이에 대한 법과 제도가 없다면 원전 자체의 미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늦었다는 주장은 외국 사례를 봐도 과장이 아니다. 미국은 1982년 핵폐기물정책법을 제정한 뒤 20년 만에 네바다주 유카산을 고준위 폐기물 영구처분장으로 확정했다.
프랑스 역시 1991년 법에 따라 방사성폐기물 연구에 2조6,000억원을 쏟아 부은 뒤 2006년 종합보고서를 내놓았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근거로 새 법을 제정, 2015년 고준위 폐기물 처분장 인허가, 2020년 사용후 핵연료를 재활용하기 위한 고속로 건설, 2030년 고준위 폐기물 처분장 운영 개시를 못박았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원자력 강국 중 사용후 핵연료 정책이 전혀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사용후 핵연료는 고준위 방사능 물질을 포함한 위험 물질이다. 원전 연료인 우라늄이 핵분열을 하면 일부가 아주 치명적인 플루토늄 넵투늄 아메리슘 등으로 바뀐다. 미국핵규제위원회의 설명에 따르면 원전에서 꺼내 10년간 식힌 사용후 핵연료로부터 1m 거리에서 1시간만 서있어도 치사량의 4배나 되는 방사능에 피폭된다. 플루토늄의 방사능이 자연 상태의 우라늄 수준으로 떨어지려면 30만년이 걸리며, 넵투늄 아메리슘 등은 1만5,000년이 걸린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전력의 40%를 원전에 의존하고 있어 폐기물량도 엄청나다. 현재 20기의 원전에서 연 700톤의 사용후 핵연료가 나와 지금까지 8,000톤이 원전 내 임시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중저준위 처분장의 경험을 봐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안전하게 영구처분 또는 재활용할 것인가 하는 과학기술적 문제 해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와 별개로 사회적 합의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칫 굴업도-안면도-부안 등을 거쳐 19년 만에 경주로 결정된 중저준위 방폐장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원자력계는 “정부가 30~50년 뒤 일이라고 기다려보자는 입장이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에너지 정책의 근간을 잃게 된다”고 우려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 日 롯카쇼무라 핵부산물 처리장을 가다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롯카쇼무라(六ケ所村)의 니혼겐넨(日本原燃ㆍJFNL)㈜ 핵 관련 시설은 핵연료ㆍ부산물 종합 처리장이다.
천연우라늄을 발전용으로 가공하는 우라늄 농축공장, 사용 후 핵연료 수용ㆍ저장 시설, 재처리 공장, 재처리 부산물인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보관하는 저장관리센터, 저준위 폐기물 처분장 등 5개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올 가을 착공되는 혼합산화물연료(MOX) 가공시설도 2012년 완공된다.
롯카쇼무라에 지금처럼 핵 관련 시설이 들어서기까지는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첫 시설인 우라늄 농축공장이 1992년 3월 조업을 시작한 이래 15년 동안 우려됐던 방사능 누출 사고는 없었고, 주민과 주변 자연에 대한 정기 검사에서도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궁벽한 시골 마을이 살 만한 곳으로 바뀌는 경제 효과가 두드러졌다. 주변의 자연환경은 이곳에 핵 관련 시설이 밀집한 까닭을 쉽사리 짐작하게 한다. 핵 관련 시설에 필요한 자연 조건을 고루 갖추었지만, 불모의 땅이기도 하다.
주일 미 공군과 항공자위대의 기지가 있는 미사와(三澤)시에서 롯카쇼무라로 향하는 왕복 2차선 지방도를 40분쯤 달리는 동안 사람 그림자를 찾기 어려웠다.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를 빼고는 삼나무와 활엽수가 빽빽한 숲, 넓은 밭과 목초지,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호수와 강에 떠있는 백조 무리가 전부였다.
사람보다 반달곰이나 너구리와 자주 만난다는 택시기사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롯카쇼무라에 들어서면서 경관이 확 바뀌었다. 최신 아파트단지와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 풍력발전용 바람개비, 말끔하게 정비된 항구 등이 다른 세계에 들어선 듯했다.
일본 전국에서 매년 10만 명이 찾아온다는 언덕 위의 PR센터에 들렀다. 원통형 전시관을 나선형 복도ㆍ사무동이 에워쌌고, 노랑 파랑 연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핵 관련 시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설을 축소한 모형을 통해 모든 작업 내용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듯 핵 연료 주기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컴퓨터도 곳곳에 놓여 있다.
아카사카 다케시(赤坂猛) 홍보부장의 안내로 2중의 검문을 거쳐 핵 관련 시설로 들어갔다. 재처리 공장과 고준위 폐기물 저장관리센터 등 방사능 피폭 가능성이 큰 시설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 납이 들어간 특수유리 외에는 일반 산업시설과 다르지 않았다.
시험운전이 한창인 재처리공장은 11월 본격 가동된다. 처리능력이 연간 800톤으로 일본 전체 수요의 80%를 소화한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저장관리센터에는 고형화한 방사성폐기물을 담은 스테인리스용기(캐니스터) 1,180개가 보관돼 있다. 2009년까지 2,880개로 수용능력이 늘어나 해외 재처리 폐기물과 자체 재처리 공장의 폐기물을 모두 보관할 수 있다.
여기서 30~50년 동안 공기로 냉각한 후 장차 건설될 최종 처분장으로 보낸다. 고준위 폐기물 저장관리센터에 비하면 저준위 폐기물 처분장은 쓰레기매립장 같았다. 땅을 12m 정도로 파낸 곳에 드럼통을 차곡차곡 쌓아 콘크리트로 밀봉하고, 나중에 흙으로 덮으면 그만이다.
시설 전체가 핵 무기 생산에 전용 가능하리라는 짐작이 마음에 걸렸다.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의 종류가 전혀 다르다거나 MOX 분말에서 고농도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기술은 미국에만 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관이 24시간 4명 이상 상주, 일본 정부 감시관과는 별도로 핵 물질의 양과 농도를 점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됐다.
이런 엄밀한 감시체제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핵 재처리 검토나 고준위 폐기물 보관시설 입지 선정에 큰 변수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람 하기 나름이니까.
롯카쇼무라=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 다나카 기획조정관 인터뷰
“이제 겐넨(原燃) 시설이 없는 롯카쇼무라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전국 기초단체의 인구가 크게 줄고 있지만 우리는 그대로여서 상대적 증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풍력발전소나 핵 융합 실험시설, 재생에너지 연구시설 등이 들어서 앞으로 과학ㆍ에너지 단지로 발전할 가능성도 크지요.”
다나카 유키오(田中幸雄ㆍ사진) 롯카쇼무라 기획조정관은 핵 관련 시설이 밀집한 현재의 상태는 지자체의 부단한 주민 설득과 주민들의 ‘지역 살리기’ 고려가 절묘하게 합치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애초에 롯카쇼무라는 1960년대 석유화학 콤비나트 예정지로 지정됐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병 등 공해 사건이 잇따라 주민 반대가 극심했던 데다 2차에 걸친 석유위기로 장밋빛 개발계획이 좌절했지요. 석유비축 탱크 51기가 들어선 것이 전부였습니다. 거대한 토지가 확보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핵 관련 시설 유치 이야기가 나왔고, 이바라키(茨城)현 도카이무라(東海村) 핵 관련 시설에 주민 400명을 견학시키고 일일이 부락을 돌며 끊임없이 설명회를 가져 다수 주민의 찬성을 얻었습니다. 자연 환경 때문에 옛날부터 ‘까마귀도 가지 않는 롯카쇼무라’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마을을 어떻게 든 살려야 한다는 고려가 앞섰던 것이지요.”
굳이 주민투표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환경단체 등 외부 세력의 끈질긴 반발과는 대조적으로 주민들은 확고한 찬성 의사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 250억엔의 교부금을 받아 교육시설 등 주민 복지시설을 정비했고, 지금도 관련 지원금이 매년 지자체 예산의 절반인 50억엔에 이른다.
“안전이요? 겐넨 직원 2,000명이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최종 처분장은 절대 두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고준위 폐기물 관리센터와 재처리 공장 유치가 큰 어려움 없이 결정됐으니 나머지 시설이야 말할 게 없지요.”
롯카쇼무라=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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