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금 이중부과 그만' 제안한 정주영씨실수한 직원에게 벌칙 주거나 시민에게 보상을
“세금이나 공과금, 각종 이용요금을 두번 내라고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그만인가요?”
자동차 판매대리점 사원 정주영(36)씨는 최근 출근길 집 대문 앞에서 지역 케이블TV 수신료 고지서를 받아 들고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이미 냈는데…. 어찌 된 일이지?” 정씨는 케이블TV 회사에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납부 사실을 설명했지만 그 때마다 업체측은 “전산상 확인이 안되니 영수증을 팩스로 보내라. 영수증이 없으면 안 낸 것으로 알고 연체료를 물리겠다”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행히 영수증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정씨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업체가 잘못했는데 왜 이미 돈을 낸 내가 납부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업체는 아무 책임도 안 지지?” 사무실에서 영수증을 팩스로 전송하던 정씨는 동료에게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동료는 “비일비재한 일인데 우리같이 힘없는 서민들은 그저 영수증을 잘 챙겨야지 별 수 있냐”고 푸념했다.
정씨는 예전에도 영수증을 잃어버려 전기요금을 두번 납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전기, 가스, 수도, 인터넷 등 매월 10여종이 넘는 공과금이나 이용요금 25만~30만원을 직접 꼬박꼬박 내고 영수증을 챙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중납부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월 11%의 연체료까지 고스란히 물기도 해요.”
자동납부로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전세 등으로 이사가 잦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자동납부는 되려 이중납부를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혼한 뒤 7년 동안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거듭한 정씨도 결혼 초 자동납부 결제를 신청했다 전에 살던 집의 가스비 등이 통장에서 계속해서 빠져나가 되찾는 데 애를 먹었다.
이중부과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예 실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시민에 책임을 떠넘기거나‘착오’라는 짧은 말 한마디로 잘못을 덮는 관공서나 기업의 안일한 대처 방식 때문이다.
경기 안산시는 공과금 고지서가 2번 발행됐을 때는 피해를 본 시민에게 1만원짜리 상품권을 주고 있지만, 그밖에 대책을 마련한 관공서나 기업은 거의 없다.
“입으로만 고객 만족 서비스를 외치지 말고 이중부과를 한 직원에게 벌칙을 주거나 시간적 금전적 피해를 본 시민에게 보상을 하면 어떨까요. 무성의한 고지서 발행이 줄지 않을까요.” 정씨는 9일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 ‘이중부과 이제 그만’아이디어를 냈다.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 한국일보·희망제작소가 알아봤습니다
이중 고지되거나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이 청구된 세금이나 공과금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
관공서나 기업은 팔짱만 끼고 있고 시민만 바쁜 시간을 쪼개 발품을 팔아야 한다. 해당 관공서를 직접 찾아 영수증 등 증빙 서류를 제출하거나 심하게는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면 이중부과를 포함해 납세자에 잘못 부과된 세금이나 공과금은 어느 정도나 될까. 한국일보와 희망제작소가 실태와 대책을 함께 알아봤습니다.
일단 걷고 불평하면 돌려주자
2005년 한 해만 시민에게서 생돈을 뜯어낸 국세와 지방세가 2조원에 육박하고 전기,가스요금도 수백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시민만 속을 태울 뿐 관공서나 기업들은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국세청이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부실 과세 등으로 시민에게 되돌려준 돈이 1조5,838억원이나 된다.
이중 납부가 확인되어 환급한 돈이 4,169억원이고, 그 밖에 국세청이 스스로 실수를 인정한 경우도 3,138억원이다. 시민이 행정소송을 해 간신히 받아낸 돈은 8,531억원. 2004년 8,385억원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2000년 이후 환급액을 합치면 무려 6조원에 달한다.
지방세 과오납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2005년에만 211만건 4,026억원을 잘못 징수해 2004년보다 19.8%나 증가했다. 공과금도 마찬가지. 한국전력공사가 2003년 1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이중으로 거둔 전기 요금은 425억원이나 된다.
한전은 “다음달 청구서 발행 시점까지 고객이 납부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미납으로 처리되어 다음달 요금에 더해 청구서를 발행한다”며 “이를 모르고 고지서에 적힌 합산액을 그대로 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확인을 하지 못한 고객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시민에겐 당근을 직원에겐 채찍을
거듭되는 징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세무 전문가들은 해당 직원에게 ‘안일한 업무’책임을 묻고, 불편을 입은 시민에게는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희망제작소 김이혜연 연구원은 “절차가 너무 복잡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외에도 사죄비 지급이나 기관의 책임을 묻는 별도의 입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대형 할인마트가 시행하는‘계산착오 보상제’를 세금이나 공과금, 각종 사용요금 부과에도 도입하자는 목소리에 귀기울여 볼 만하다.
계산 실수나 매장 가격 고지 오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품권 5,000원으로 보상하는 제도다. 실수로 인한 차액은 물론 불편을 끼친 데 대한 사과의 뜻으로 상품권이 주어진다.
경기 안산시청도 세금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고 있다. 안산시는 1998년부터 엉터리 세금고지로 고생한 시민에게 교통비 명목으로 1만원짜리 상품권을 보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2002년부터는 세금이나 공과금 외의‘민원서비스 미(未)이행 보상금 제도’로 통합해 운영하고 있다. 해당 공무원에게는 인사상 책임까지 묻는다.
납세자연합회 김홍수 세무사는 “현재 잘못된 세금이나 공과금 부과에 대해선 환불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연체 이자율은 연 10%가 넘는 고이율이지만 과다 부과로 인한 환급 때는 연 3~4% 이자율만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
■ 삭막한 고지서는 가라
“각종 고지서를 통합해 발송할 순 없나요.”, “등록금 고지서에 10년간 인상률을 담아주는 건 어떨까요.”
반갑지는 않지만 꼭 챙겨야 하는 게 고지서다. 가정이나 사무실에는 매달 수많은 고지서가 우송된다. 그런 탓인지 한국일보와 희망제작소에도 고지서와 관련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대학생 호종훈(26)씨는 등록금 고지서만 보면 답답해진다. 수백 만원의 뭉칫돈을 내라는 고지서의 양식이나 내용은 삭막하다 못해 가끔은 고압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자투리 공간을 이용해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순 없을까. ‘한 학기 동안 내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몇 권인가’, ‘지난 학기 등록금이 어디에 쓰였고 10년간 등록금 인상률은 얼마인가’.
호씨는 “공연히 학부모나 학생에게 학교 사정을 알린다고 행사를 열거나 소식지를 보내는 대신 어차피 보낼 고지서를 이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51) 변호사도 고지서 관련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2005년 봄 미국에서 받은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하고 깜짝 놀랐다.
고지서에는 부과한 요금 중 원자력인지 수력인지 화력인지 에너지 원천을 종류 별로 공개하고 그 외의 재생에너지 비율도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시민들에게 대체에너지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것이다.
‘찻물을 끓일 때 전열기를 100도까지 올릴 필요는 없다’는 등 환경보호 및 에너지 절약 캠페인 문구도 있었다.
직장인 이한복씨는 요금 고지서를 통합해 발송해 줄 것을 제안했다. 이씨는 매달 KT에서 전화요금 2개와 인터넷 통신요금 1개 등 고지서 3개를 따로따로 받고 있다. 기업도 고객도 불편하다.
이씨는 “회사는 우편 요금을 줄이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자원 낭비를 막는다는 점에서 남는 장사가 아니냐”고 말했다.
희망제작소 안진걸(35) 사회창안팀장은 “조금만 신경 쓰면 딱딱한 공과금 고지서가 시민에게 감동과 정보를 주는 창구 노릇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철원 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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