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도 일종의 학교라고 생각해. 인생 공부하는….”
옛날 옛적 친구 한 명이 대학에 몇 번 떨어지고 입대하며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울 의지가 있다면 학습의 장은 어디서나 펼쳐질 수 있겠지요. 대학이든, 군대든, 심지어 서아프리카의 가나에서도 말입니다.
가나가 벌어들이는 수입 중 3위를 차지하는 것이 관광수입이라고 하는데 막상 관광객 별로 못 봤습니다. 대신 학습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학점이나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 오는 대학생들이 많지만, 간혹 경험 그 자체를 위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전한 호기심을 채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독서만큼 유용한 것은 오직 여행뿐일 테니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낯선 환경에서 모처럼 여러 가지를 배워볼 기회도 됩니다. 어떤 책에서 읽자니 ‘아프리카 여행에서 배운 것들’ 이라는 리스트에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손으로 밑을 닦는 방법
- 인내심
- 사람 밀치는 방법
- 한 바가지의 물로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목욕하는 방법
순수한 여행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가나의 가장 큰 결함은 이렇다 할 관광거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케냐의 마사이마라,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처럼 모처럼 집에 보내는 엽서에 언급할 만한 결정적인 볼거리를 찾기 힘듭니다.
소소한 구경거리는 물론 있지만 서울에서 만 하루 이상 꼬박 날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보다 좀 더 크고 뚜렷한 무엇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멀리까지 오고 보면 어지간히 소박한 심성의 여행자라 할지라도 이동에 들인 돈과 시간, 즉 본전을 생각해서라도 단순한 인생경험 이상의 고유한 문물을 보길 원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가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국립공원은 북부에 있는 몰레(Mole)라는 곳입니다. 대중교통으로 쉽게 닿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케냐나 보츠와나, 남아공의 유명한 게임 파크(game park)들에 비해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이 장점이지요.
국립공원 입장료 5달러만 내면 되고 공원 내 호텔의 그럭저럭 깨끗한 방이 하루에 20달러입니다. 수질관리가 엉망이지만 수영장도 하나 있고, 원숭이가 놀러오기도 하고, 나름대로 독특한 정취가 있어요.
그러나 구경할 만한 동물은 역시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코끼리가 제일 볼 만합니다. 모텔의 관망대에 앉아 있으면 너른 평원에 펼쳐진 물웅덩이에 아침저녁으로 목욕하러 떼로 몰려오는 코끼리를 실컷 볼 수 있습니다. 공원 전체에 600마리 정도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코끼리 구경에 지치면 사람 구경을 해 볼까요. 낡은 자전거를 빌려 타고 6km 정도 페달을 밟으면 공원 입구에 ‘라라방가’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바싹 메말라 불그레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조그맣고 심심한 마을인데 한 가지, 색다른 볼거리가 있어요.
가나 최고(oldest)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사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짜 그렇게 오래되었는지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하군요.
모스크를 보여준 대가로 기부금을 받아내려는 노력은 더욱 대단합니다. 동네 청년 예닐곱 명이 저를 빙 둘러싸고 지갑이 열릴 때까지 감언이설과 애걸, 공포 분위기를 섞어가며 시간을 끕니다.
치사하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해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 척박한 마을에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경제활동이 그것 정도라면 제가 그들이라도 아마 비슷한 일을 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 모스크는 꽤 근사했어요. 진흙과 나무 막대기로 만든 머드 앤 스틱(mud and stick) 모스크였는데, 이런 형태의 건축물은 가나와 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말리(Mali)가 가장 유명합니다.
라라방가의 또 다른 명물은 ‘살리아’라는 이름의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살리아 형제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대학)을 받은 사람들로 국제적인 연결망을 가지고 홈스테이 업무를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선각자 특유의, 좀 거만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들이더군요.
마을 주민들은 이들 형제가 다른 민박집의 영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라라방가로 들어오는 각종 지원금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만 이방인인 저로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요.
“한국인이라고? 우리 집에도 한국 여자가 한 명 있는데.”
살리아 형제 중 형에게 이끌려 가보니 정말 한국인 여학생이 한 명 있더군요. 저나 그 여학생이나 깜짝 놀랐습니다. 미국 동부에서 대학을 다니는 교포였는데 아직 어리지만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예쁜 아가씨였어요.
해외체험 프로그램으로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라라방가 마을을 위한 프로젝트로 꽃밭(마을 사람들 주장에 의하면 살리아 형제의 개인 소유 정원이랍니다.
뭔가 수상하지요)을 만드는 일?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제3세계에서의 체험이라는 진귀한 포장을 한 겹 벗기면 단순한 막노동입니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저평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낯선 경험이 곧 학습과 등식은 아니겠지요. 가나의 다른 곳을 많이 구경하고 싶은데 일이 바빠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합니다.
서아프리카, 그것도 생전 이름도 못 들어본 깡촌에서 미국 동부 출신 혼성 대학생 5인조가 흙투성이가 된 채 열심히 꽃밭을 만들고 있다니, 인근의 수단식 모스크 못지않게 기묘한 풍경이었습니다. 쌍둥이 형제는 그 옆에서 잡담하며 담배 피우고 있더군요. 공중 화장실 하나 없는 마을에 꽃밭이라뇨.
희귀성이라는 것은 순전히 심리적인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 왔습니다. 노력에 의해 극복할 수 있고 마땅히 극복해야만 한다고 말이지요.
여행 인프라가 열악하고, 고생스럽고, 그에 비해 볼거리가 많지 않은 아프리카-가격대 성능비로 치자면 세상의 많은 곳보다 확실히 떨어집니다-를 여행지로서 과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닌 척 해도 실은 희귀성이라는 모호한 감정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몰레와 라라방가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고 보니 가나여행 마지막 목적지였군요.
유독 인상적인 경험으로 남은 것은 가기 힘든 서아프리카 북부 지역이라는 희귀성 때문이 아니라 그 여학생 때문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렇게 머나먼 대륙 속 조그마한 촌락, 흙과 소똥을 이겨 지은 집 마당에서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동포와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흔히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 몰레(Mole) 국립공원 가는 길
수도인 아크라(Acra)에서 가나 북부의 중심도시인 타말레(Tamale)까지 가야 한다. 버스로 열 두 시간 정도 거리. 타말레에 도착해서 하루에 한 대 있는 국립공원행 버스를 탄다.
현지인들은 중간의 마을에서 내리게 되는데 그 중 마지막 지점이 라라방가이고 그 다음이 종점인 몰레 국립공원이다.
타말레에서 공원까지 4시간가량 걸린다. 험난한 비포장도로라 심하게 덜컹거릴 뿐더러 정원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이 끼어 앉아(하루에 한 편 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 한다) 열린 창문으로는 들어오는 메마른 흙먼지를 모조리 마셔야 한다.
라라방가[가나] = 글ㆍ사진 소설가 박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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