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고 있는 일한사전에서 ‘사케’를 찾아보니 ‘술’이라고만 풀이돼 있다. 한자로는 酒라고 쓰는 모양이다. “사케와 기치가이 미즈”(술은 미치게 하는 물)라거나 “사케니 노마레루”(술에 먹히다, 술에 취해 제 정신을 잃다) 같은 이 사전의 예문에서도 ‘사케’는 그저 ‘술’이라는 뜻이다.
본디 뜻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케’가 ‘술’처럼 주류 일반을 가리키는 것 같진 않다. 그러니까 맥주나 위스키나 와인을 사케라 부르는 것 같진 않다.
사케는 한국인들이 흔히 정종이라 부르는 일본식 청주를 주로 가리키는 듯하다. 일본어로 ‘마사무네’라 읽는 정종(正宗)은 일제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사케의 브랜드라고 한다. 본디 고유명사였던 것이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해방 뒤 ‘미원’이라는 조미료가 그랬듯.
집안 어른들이 정종을 마시는 걸 자주 보며 자라긴 했으나, 술을 배운 뒤에도 이 일본식 청주에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왠지 이 술은 늙은이들의 술 같았다. 사케를 처음 마셔본 것은 교토(京都)에서다.
어둠이 깔린 뒤에야 이 도시에 도착한 김철 홍정선 형과 나는 다짜고짜 역 근처의 자그마한 술집에 들러 사케를 마셨다. (그 술집에서 홍정선 형의 일본어 실력을 안 게 큰 소득이었다.
그는 아마 그 때도 일본어 책을 술술 읽을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가이드를 자처한 그가 일본인 주인에게 건넨 일본어는 “사케!” 한 마디였다.) 교토를 떠난 뒤, 나는 사케를 잊고 살았다.
최근 들어, 나는 이 술에 맛을 들였다. 횟집에서 친구들의 권유로 몇 차례 히레자케(불에 태운 복어 지느러미를 데운 사케에 넣은 것. ‘히레’는 지느러미라는 뜻이라 한다)를 마셔보다 익숙해져, 사케 일반에 정을 들이게 된 것이다.
이 ‘늙은이들의 술’을 마실 만큼 나도 나이가 차 그런지도 모른다. 사케 맛을 정말 아는 이들은 그 향을 음미하려 차게 해서 마신다지만, 나는 여느 술꾼처럼 데워서 마신다.
더러 들르는 술집 한 군데는 연어 회 요리가 일품인데, 데운 정종에 연어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면 거기가 바로 낙원이다. 우연이겠으나, 연어를 뜻하는 일본어도 ‘사케’다. 그러면 내 낙원의 메뉴는 사케사케인가? 아무튼, 저녁 나절의 낙원에서 사케사케를 음미하고 있자면, 교토가 생각난다. 내가 처음 사케를 마셔본 도시가.
요즘 외래어 표기법으론 ‘교토’라 적지만, 내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엔 이 도시 이름이 ‘쿄오토오’였다. 일본어의 소위 청음(淸音)을 음성환경과 무관하게 우리말 격음에 대응시키고, 일본어의 장음을, 그 나라 문자의 표기법에 맞춰, 두 음절로 잡은 탓이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도 그 시절엔 당연히 ‘토오쿄오’였다. 처음 ‘쿄오토오’라는 활자를 읽었을 때, 나는 대뜸 그것이 ‘토오쿄오’를 잘못 적은 것 아닌가 생각했다.
이미 ‘토오쿄오’를 알고 있었던 내게, 글자를 뒤바꿔 놓은 듯한 이름의 도시가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도시는 ‘토오쿄오’ 이전에, ‘토오쿄오’보다 훨씬 오래도록, 일본의 수도 노릇을 한 도시였다. 선생님은 ‘쿄오토오’가 우리 경주에 해당하는 도시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의 그 비유는 썩 적절해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쿄오토오’라는 도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 ‘교토’ 땅을 처음 밟았다. 나는 ‘교토’ 이전에 잠깐 그 나라의 수도 노릇을 한 도시를 들러 거기 간 참이었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 그 나라의 현재 수도 ‘도쿄’엘 들를 것이었다.
교토에서 우리(예의 두 문학평론가와 나)는 문학평론가 김우종 선생과 합류했다. 김 선생님도 오사카 국제조선학토론회에 참석했던 것이 분명한데, 거기선 뵌 기억이 없다. 이 원로 평론가와 소장평론가들 사이에 교토의 모 호텔에서 만나자고 약속이 돼 있었던 듯하다.
김 선생님이 방을 잡아놓기로 얘기가 됐던 모양인데, 운 나쁘게도 그 날 그 호텔에 투숙객이 넘쳐났던지 김 선생님은 큰 방 하나만을 예약해 놓았다. 남자 넷이 한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나는 본디 잠자리가 바뀌면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방을 함께 쓰게 되면 더 그렇다.
그런데 둘이 자는 것도 아니고 넷이라니. 게다가 홍정선 형은 한국일보에 줄 글이 있다며(조선학 토론회 총평이었는지, 아니면 그 즈음 그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쓰던 미술비평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는 것이었다.
오늘 밤 잠은 다 잤구나 싶었는데, 어찌어찌 하다 잠이 들었다. 나라(奈良)에서 몸을 많이 쓴 덕이었는지도 모르고, 숙소에 오기 전 몇 잔 마신 사케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운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이튿날부터 나는 문학평론가들과 헤어져 독립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일찍 잠이 깼다. 문학평론가들은 다 자고 있었다. 나는 호텔을 나와 막 깨어나기 시작한 교토를 걸었다. 그것은 그 뒤 내 버릇이 된, 낯선 도시 산책의 시작이었다.
처음 발을 디딘 도시를 길들이기 위해 내가 쓰는 방법은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무조건 걷는 것이다. 서울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도시는 드물기 때문에, 어지간한 도시는 지도를 들고 너덧 시간 걸으면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나는 적잖은 도시를 길들였다. 리스본에서 베오그라드에 이르는 유럽 도시들을. 보스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미국 도시들을.
교토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에도, 호텔 접수계에서 얻은 시내 지도를 들고 나와 걷기 시작했다. 호텔 근처에 이름난 유적지는 없었으나, 나는 이 도시에 절이 많다는 데에 놀랐다.
그 때 느낌으론 교토엔 절밖에 없는 것 같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동네엔 두 집 건너 한 집이 절이었다. 규모는 들쭉날쭉이었지만, 처음 본 교토는 절의 도시였다. 교토에서 사흘째 머물렀을 때에야, 이 도시엔 절밖에 없구나 하는 처음생각이 가셨다. 그러나 지금도 교토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 절들이다.
교토에서 나는 차를 거의 타지 않았다. 나는 그 도시의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엔 행인들이 뜸해 산책자의 우수를 느꼈고,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며 군중 속의 고독을 느꼈다. 이 도시엔 교토 사람들 못지않게 이방의 관광객들이 많아 보였다. 나처럼 일본 바깥의 이방에서 온 이들이든, 아니면 일본 내의 이방에서 온 이들이든.
은각사(銀閣寺)에서 개천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있는 ‘철학의 거리’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철학자 시늉을 하긴 불가능했지만, 나는 그 길을 끝까지 걸었다. ‘철학의 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교토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ㆍ1870~1945)가 이 길을 산책로로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선(善)의 연구> 라는 책이 번역돼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니시다는 천황의 위상을 ‘무(無)의 자리’로 개념화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했다고 비판받기도 하지만, 일본의 ‘서양철학’에 서양으로부터의 자율성을 부여한 첫 번째 철학자다. 니시다 철학을 ‘교토 철학’이라고도 부르듯, 그의 존재는 또 교토라는 도시에 어떤 학문적 아우라를 부여했다. 선(善)의>
서양말 ‘필로소피아’(philosophiaㆍ어원적으로 ‘앎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를 ‘철학(哲學)’으로 처음 옮긴 이는 일본인 니시 아마네(西周ㆍ1829~1897)다.
니시 아마네는 본디 이 말을 희현학(希賢學)으로 옮겼다가 현(賢)이란 글자의 유가적(儒家的) 색채가 꺼림칙해 이를 ‘희철학(希哲學)’으로 고쳤고, 여기서 다시 ‘희(希)’자를 빼버리고 ‘철학(哲學)’만 남겼다고 한다.
‘철학’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필로소피아’와 동떨어진 듯하나, 그 앞선 형태인 ‘희현학’이나 ‘희철학’은 필로소피아의 직역에 가깝다. ‘철학’의 ‘철’은 ‘필로소피아’의 ‘소피아’, 곧 (참된) 앎인 것이다.
교토에 들른 이방인들 대부분이 그러듯, 나 역시 금각사(金閣寺)에서 잠깐 감상에 젖었다.(은각사와 금각사는, 지금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둘다 ‘긴카쿠지’다.
내 초등학생 때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이 둘이 구별된다. 거기 따르면, 은각사는 ‘긴카쿠지’고 금각사는 ‘킨카쿠지’다.) 여느 이방인의 경우처럼 연못 위에 떠있는 금박의 사리전 때문이었고, 그 사리전에 불을 지르는 사나이를 그린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ㆍ1925~1970)의 동명 소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금각은 1950년 한 사미승의 방화로 불타 없어진 것을 그 뒤 재건한 것이라 한다.
<금각사> (1956)는 미시마의 탐미주의가 다다른 한 정점이라 할 만하지만, 작가 자신은 작품 바깥에서 ‘미(美)’라는 것에 대해 늘 경멸적 제스처를 취했다. 금각사>
<금각사> 가 출간된 이듬해에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ㆍ1902~1983)와 가진 대담에서, 미시마는 “고바야시씨는 언젠가 미라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게 결코 아니라고 쓰셨는데, 제가 여기서(소설 <금각사> 에서)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 에서 재인용)라고 말한 바 있다. 번역어> 금각사> 금각사>
이 대담말고도 여러 자리에서, 미시마는 유미주의라든가 ‘미’라는 것을 자신은 하찮게 여긴다는 투로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젊은 날의 미시마는, 천황제 파시즘을 낭만적으로 동경하다 기괴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만년과 달리, 촌스럽지 않았다.
탐미주의 소설가가 소설 바깥에서까지 “아름다운 게 제일”이라는 식으로 뇌까리고 다녔다면, 영 칠칠치 못해 보였을 것이다. ‘미’라는 것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미’는 아름답지 않다”는 말은 “‘선’은 착하지 않다”거나 “‘진’은 참되지 않다”는 말처럼 기묘하다), 그 ‘미’라는 것(의 힘)이 소설 <금각사> 의 말더듬이 젊은 중을 옴짝달싹 못하게 휘어잡는 것은 사실이다. 금각사>
흔히 지적되는 바지만, 극단의 탐미주의는 더러 극단의 파시즘으로 통로를 내는 모양이다. <우국(憂國)> (1960) 이후에 미시마가 걸은 문학적 행로와 그가 조급하게 선택한 죽음의 방식은 현대예술사가 종종 목격한 탐미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다리에 한 겹의 시멘트를 더 발랐다. 우국(憂國)>
탐미주의가 파시즘의 유혹에 이따금 취약한 것은, 극단적으로 ‘미’를 추구하는 마음자리가 허무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밤 사케를 마셨다.
내 일본어는 금세 홍정선 형의 일본어보다 나아졌다. 내가 그에게 배운 일본어는 “사케!” 외마디였으나, 예의 바른 나는 술집 주인이나 종업원에게 이렇게 외쳤다. “오사케, 플리즈!”(‘오’는 정중함을 드러내는 접두사라 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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