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밤부터 2일 낮까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호텔에서는 평소 좀처럼 기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급히 호텔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두 차례나 목격됐다.
늘 피곤하고 굳은 표정이어서 기자들은 김 본부장의 얼굴을 통해 협상 상황을 읽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날 그의 움직임은 미국과의 지리한 협상전에 종지부를 찍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김 본부장이 1일 오후 7시45분께 협상장을 떠나 청와대를 다녀온 뒤 하얏트호텔 주변에서는 ‘사실상 타결’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가 2일 낮 11시30분께 한 시간 가량 청와대를 다녀온 직후에는 ‘타결 공식화’ 분위기가 확산됐다. 실제 김 본부장이 2일 낮 협상장으로 돌아오자 청와대 주변에서는 협상 완전 타결 발언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종 협상 결재안에 사인한 것이다.
지난 달 31일 협상시한을 48시간 연장한 후 최종 타결을 선언할 때까지 협상장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을 놓고 ‘치킨게임’(두 차가 마주보며 돌진하다 먼저 피하는 쪽이 지는 게임) 양상을 보였다. “결렬도 상관없다” “오래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배짱 싸움이 계속됐다.
연장 협상이 결정된 31일 오전 4시30분께 농업분과장인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은 미국 측에 우리 측이 내놓을 수 있는 농산물 분야 최종 양허(개방)안을 던졌다. 그리고 “그냥 자자”고 말했다.
받으려면 받고, 말려면 말라는 뜻이었다. 배 국장의 이 같은 자세에 미국 측 협상단도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기싸움 때문인지 우리 대표단은 언론의 앞서가는 기사 하나 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우리 협상력을 손상시키고 있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한국 측 협상단은 타결에 무게를 두는 기사들을 특히 싫어했다. 한국이 이번 협상을 어떤 식이든 타결짓기로 마음을 먹은 것으로 알려질 경우, 미국은 더 느긋한 자세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상 타결이 결정된 2일 오전까지도 이 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금융서비스 분과장인 신제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심의관은 “타결이 임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며 “언론이 너무 타결 임박을 강조하면 우리 측 협상단에 압력이 되고, 결국 오래 버틴 쪽이 이기는 것”이라고 언짢은 마음을 드러냈다.
금융 단기 세이프가드(외환위기시 송금 일시금지) 도입을 미국에 끝까지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결’기사는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협상이 길어질수록 한국 측 협상단 대부분은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외부 접근이 차단된 2층 협상장에서 두문불출했다. 직접 협상단이 아닌 허용석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등 협상 전략에 필요한 정부 관료들만 수시로 협상장을 오갔다.
미국도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미 무역대표부(USTR) 대변인이 협상장에 상주하며 필요할 때마다 한국 기자들이 있는 임시 기자실로 찾아와 미국 측 입장을 적극 설명하기도 했다.
30일 오후 미국 측의 비공식 48시간 협상 연장 제의를 한국이 거부했다는 소식이 퍼질 때는 “제의한 적도 없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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