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봄 초등학교 전교생 모두 마을 앞산의 잔솔밭으로 갔다. 오른손에는 나무 집게, 왼손에는 연한 갈색 물약이 담긴 깡통을 들었다.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는 아이들 손가락 만하게 자란 송충이가 붙어 있었다. 집게로 잡아 깡통 속 물약에 담그면 송충이는 금세 축 늘어졌다.
그것을 소나무 가지에 빨래 널듯 걸었다. 선생님은 죽은 송충이가 말라서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그 가루에 닿으면 멀쩡한 송충이까지 죽는다고 하셨다. 깡통의 물약이 다 없어질 때까지 아이들은 웃고 떠들며 송충이를 잡았다.
■ 코흘리개까지 구제에 동원해야 할 만큼 많았던 송충이가 1970년대 후반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송충이 대신 새로 등장한 솔잎혹파리의 해는 훨씬 지독했다. 솔잎이 갉아 먹힌 소나무는 생장은 늦춰져도, 새 잎을 피워 생명을 이을 수는 있었다.
반면 솔잎혹파리에게 당한 소나무는 거미에게 진이 빨린 곤충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남에서 북으로,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솔숲이 칙칙한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꼭 살려야 할 소나무에는 살충제와 영양제 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렸고, 천적인 먹종벌이 각광을 받았다.
■ 솔잎혹파리 공포가 잦아들던 90년대 말 재선충이라는 최악의 해충이 나타났다. 가는 실 같은 선충이 엉켜서 소나무의 수분ㆍ영양 공급 통로를 틀어막아 버린다. 솔잎혹파리에 시달려도 7년 정도 버티지만 재선충에 감염되면 늦어도 이듬해면 완전히 말라 죽는다.
'소나무 에이즈'라는 무시무시한 별명 그대로 단기간에 100%의 치사율을 보인다. 나무 깊이 사는 재선충을 공격할 천적도 없고, 수액주사 살충제의 효과도 장담하기 어렵다. 매개충인 솔수염하늘소를 구제하거나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베어내 그 이동을 차단할 수밖에 없다.
■ 소나무 재선충 피해는 이미 경기ㆍ강원 일부 지역으로까지 번졌다. 세계 최초로 잣나무 재선충 피해까지 확인됐다. 당장 광릉 수목원의 아름드리 잣나무 숲이 위태롭다.
북방수염하늘소가 매개하는 잣나무 재선충은 소나무 재선충과 마찬가지로 잣나무를 순식간에 말려 죽인다. 한국의 대표적 침엽수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동시에 위협하는 재선충 공포는 결국 인간의 손으로 덜어주어야 한다.
국민 모두 의심스러운 나무를 보면 바로 신고하고, 목재 반출 금지 등에 적극 협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 노력이 있고서야 비로소 솔잎혹파리의 예에서처럼 나무 스스로 저항력을 갖추는, 자연의 치유력도 기대해 볼 수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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