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모두 그 영화를 알고 있다. 살짝 꼬아 올린 다리와 야릇한 미소,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무릎과 무릎 사이의 진수를 보여준 영화. 바로 <원초적 본능> 속의 샤론 스톤이 보여준 뇌쇄적 자태가 만들어낸 놀라운 에너지. 이 대담한 관능적 상상력을 단지 하룻밤 몽정을 위한 도구나 도색잡지 속에 탕진 시키지 않은 자,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 원초적>
폴 버호벤은 악마의 심장을 가진 사내다. 적어도 그에게 선한 인간이라는 것은 위선이자 거짓이다. 세계영화계에서 그처럼 철저하게 인간의 육욕을 인정하고, 성악설을 꾸준히 지지해온 감독도 드물 것이다. 그는 대놓고 ‘폭력장면이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격렬하면 오히려 유머를 유발한다’고 믿는다.
물론 어두운 욕망의 덫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인간 군상을 담아내는 헤모글로빈의 시인들은 영화계에 널렸다. 그러나 버호벤은 ‘성과 폭력’ 이 오래된 금기를 장르 안에서 어떤 죄의식도 없이 그저 하나의 놀이처럼 담대하게 이용한다. <원초적 본능> 이나 <로보캅> 을 보면서 예술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로보캅> 원초적>
그저 편안하게 자리에 꾸욱 눌러 앉아 바지 가랑이 사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쾌락을, 메피스토펠레스의 놀이에 즐겁게 참여만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워서 거꾸로 불쾌감마저 일으키는 게 문제지만.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버호벤의 여자들은 죄다 악녀에 속한다. 자기의 욕망에 극도로 충실하고 기꺼이 육체와 돈을, 육체와 복수를, 육체와 쾌락을 맞바꾼다.
대부분은 양성애자이자 태연히 얼음송곳으로 상대의 목을 딸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금번 개봉되는 <블랙북> 의 스파이 레이첼이 사랑과 조국 앞에서 몸부림치는 그런 순정파 스파이가 아닐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 블랙북>
사실 겉으로는 전쟁 속의 로망을 팔아 먹지만, 버호벤은 태연히 기존의 2차대전이라는 기호 속에 배신과 속임수의 처절한 생존극을 새겨 넣는다. 박해민족으로서의 유태인이 아니라 검은 거미처럼 상대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배신자가 있고, 독일군 장교지만 사랑에 흔들리는 남자도 있다. 결국 선과 악은 허구이며, 천박하고 부박하고 즉물적인 원초적 본능의 난장판이 전쟁터보다 더 가차없이 까발려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폴 버호벤이 중세에 태어났다면 <쾌락의 정원> 을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쉬 같은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보쉬도, 버호벤도 둘 다 네덜란드 사람. <블랙북> 은 버호벤이 20년 만에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 검은 튤립의 독한 향내를 마음껏 발산한다. 블랙북> 쾌락의>
비록 그 에너지는 떨어지지만 역시 버호벤은 버호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기어이 어김없이 성악설을 잡아내는, 인생은 참 아름답지 않다 (같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이 선함을 잃지 않는다면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감독 주연의 <인생은 아름다워> 와 너무나 정반대가 아닌가). 인생은>
영화평론가ㆍ대구사이버대교수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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