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노년 대신 깍듯한 영업맨으로 뛰니 '다시 청춘'
2년 전 환갑을 넘긴 나이에 최윤호(64ㆍ경기 부천시)씨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2005년 여름. 아침마다 조정래의 <아리랑> 을 챙겼다. 주머니엔 2,000원이 전부. 동네 뒷산을 터벅터벅 오르다 중턱에서 김밥과 소주 한 병을 샀다. 아리랑>
자리를 잡고 책을 보다가 질리면 술 한잔 마시고 졸리면 잤다. ‘숲속에서의 독서, 이 얼마나 여유롭고 느긋한 노년인가’라며 자족했다. 웬걸, 몇 주가 흐르자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잠만 쏟아졌다.
#그 해 겨울. 집에서 하릴없이 뭉개는데 아내(59)가 신문을 들이밀었다. 프린터 잉크를 충전해주는 창업 정보였다. 눈을 끔뻑이며 들으니 구미가 당겼다.
서울 본사를 방문한 뒤 사업을 결정했다. 문구점 복덕방 병원 등 동네 아파트상가를 죄다 들렀다. 명함 한 장 주고 오는 일인데 얼마나 낯이 뜨겁던지…게다가 3일 동안 발이 부르트게 다녔는데 전화 한 통이 없었다.
‘괜히 했나. 돈 아까워라. 늙어 무슨 창피람.’ 후회가 밀려왔다. 빈둥빈둥 노년을 보낼 것인가, 활기찬 인생 2막을 열 것인가. 최씨의 선택은 후자였다.
늙어 고생을 사서 하다
최씨는 잘 나가는 공기업의 과장 출신이다. 밑에 부리던 부하 직원만 75명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월급이 척척 나왔다. 그는 “과장을 8년 만에 달만큼 능력도 인정 받았고 관련 분야에선 꽤나 유명했다”고 자부했다.
1997년 입사 25년 만에 명예퇴직을 했다. 인맥이 받쳐주질 않자 치열한 사내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아쉬움은 없지만 50세를 갓 넘긴 터라 아직 한창 일할 나이였다.
작은 회사를 두 군데 들락거렸지만 보람도 없었고 월급도 적었다. 창업을 하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쫄딱 망했다”는 소리만 들렸다. 방에 들어앉아 야금야금 세월을 탕진했다.
2005년 11월 슬슬 눈치를 주기 시작하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방문 잉크 토너 충전업인 ‘잉크가이(inkguy.co.kr)’로 창업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감했다. 평생 남에게 아쉬운 소리라곤 해본 적이 없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잉크 충전합니다”라는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사업 첫날 새벽 4시에 일어나 불공도 드리고 목욕재계도 했다. 마음을 다잡았지만 막상 가게 문 앞에 서니 발이 얼어붙었다. 그는 “겨우 말을 꺼내면 ‘저 사람 뭐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굴도 안 마주치려는 이도 있었다”고 말했다.
4일째 되는 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첫 주문이 들어왔다. 동네 문구점이었다. 떨리는 맘에 아내까지 대동하고 갔지만 잉크 충전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10분이면 뚝딱 할 일을 당시엔 1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렸다”고 웃었다. 서비스 대가는 8,000원. 그 돈이 그에겐 8,000만원보다 귀했다.
엉성한 실력에 실망한 탓인지 마수걸이를 해줬던 문구점에선 다시 연락이 안 왔지만 다른 주문이 이어졌다. 첫 달 매출은 20만원, 그 뒤 매출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이어가며 올해 1월에는 400만원(순익 300만원)으로 늘었다. 60대 중반에 감행한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노년 창업의 성공비결은?
그는 소심한 A형에 나이도 많다. 평생 책상머리에 앉아 부하직원을 호령하던 그에게 영업은 생소하다 못해 두려운 세계였다.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성공한 비법은 무얼까.
그는 무엇보다 “남의 사무실 문을 활짝 열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망설임 없이 전하고 온 작은 명함 한 장이 자연스레 고객을 만들어준다는 설명이다. 그는 지금까지 7,000여장의 명함과 전단을 돌렸다. 그 중 한번이라도 서비스를 받아 리스트에 올라간 고객은 450명이다.
공손한 인사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젊은이건, 아이건 할 것 없이 그는 인사부터 한다. 무시하더라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무반응이던 사람들도 막상 잉크 토너를 충전할 때가 되면 ‘인사성 밝은 그 할아버지’를 찾는다.
가격 경쟁력은 기본이다. 그는 “팔팔한 젊은이를 이길 재주가 없으니까 1,000원이라도 싸게 팔았다”고 털어 놓았다. 덕분에 잉크 토너 충전 수익보다 최근엔 재생품 판매수익이 더 많다.
아이템 선정도 중요했다. 컴퓨터 주변기기와는 친하지 않은 나이임에도 과감하게 프린터 잉크토너 충전 서비스를 골랐다. 그는 “아내, 두 아들과 상의한 끝에 프린터는 필수품이라 잠재력이 높고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무점포 창업이라 900만원의 비용(현재는 1,250만원)만 들어 부담도 적었다. 더구나 4년 전 심혈관 확장수술을 한 그에게 하루에 4, 5㎞ 걷는 일은 건강에도 좋았다. 자신감이 붙어 밤엔 아내와 함께 스포츠댄스를 배우고 있다.
“늙어서 별 짓 다한다”고 하던 주변의 반응은 이제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일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잉크 충전하는 법, 사람 대하는 법, 영업하는 법을 배웠죠.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노년을 여유롭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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