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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 광풍/ <中> 영어에 모든 걸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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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 광풍/ <中> 영어에 모든 걸 건다

입력
2007.03.2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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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부 최모(45)씨는 지난 주 중학생 아들(14)을 외국어고 준비반에 보내기 위해 서울 강남의 특수목적고 전문 학원을 찾았다 충격을 받았다.

상담 5분만에 외고 입학 준비에는 너무 늦었다는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들의 토플 점수는 210점(CBT 기준ㆍ300점 만점)이다.

중2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최저 기준(230점)에 한참 못 미쳤다. 최씨는 “외고 준비반의 평균 토플 점수가 250점대라는 말을 듣고 진작 조기유학을 보내지 못한 게 후회됐다”고 말했다.

#2. 평일 오후면 강남구 D어학원 복도에선 ‘낮선 풍경’이 벌어진다. 복도를 따라 놓인 긴 의자에서 앳된 얼굴의 초등학생들이 두꺼운 토플 교재를 들고 영어 단어와 문장을 중얼거린다. 과거엔 유학 준비생이나 거들 떠 보던 단어들이다.

그러나 학원에서 ‘월반’을 하고, 외고를 가려면 싫으나 좋으나 하루 100개씩 외워야 한다. 이모(12ㆍ초등 6)양은 “내용을 모르고 넘어갈 때도 많지만 친구들한테 뒤지지 않으려면 무조건 암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사교육 광풍과 선행학습 열풍의 핵은 ‘영어’다. 사교육 1번지인 강남을 중심으로 과학고와 외고, 민족사관학교(민사고) 등 특목고 입시 붐이 일면서 영어 선행학습도 빠르게 진화했다.

특목고 진학을 꿈꾸는 중학생들의 토플 성적은 이미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대학생 수준을 넘어섰다. 물론‘영어=특목고 입학’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들이 영어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토플 점수

외고 입학을 목표로 지난해 초 강원 원주시에서 강남 C교로 옮긴 이모(15ㆍ중 3)군은 영어 때문에 꿈을 접었다. 도내 영어경시대회를 휩쓸고 토플 성적도 230점대를 유지하는 등 영어에 관한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서울 또래 친구들에게는 250점도 우스웠다. 영어전문학원을 다니며 어렵게 따라 잡긴 했지만 다른 교과목을 소홀히 해 결국 외고 입학을 포기했다.

몇 년 전만해도 특목고 준비생 사이에 토플은 240점 안팎이면 안정권으로 통했다. 그러나 요즘은 ‘만점은 받아야 안심’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점수가 치솟았다. 대치동 M학원은 중등부 3학년 수강생의 절반이 만점자다.

영어전문 P학원은 중1반 자격 기준을 토플 260점으로 못박았다. “원어민이 미국 교과서로 가르쳐 260점을 넘지 못하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이유다.

박모(46ㆍ여) 강사는 “영어 공부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된다”고 했다. 박씨의 ‘영어 정복 일정표’는 이렇다. 발음과 회화 등 기본기는 영어 연수와 조기유학을 통해 3학년 이전에 닦아놓고 고학년 때는 토플 준비에 들어가 중학교 졸업 즈음 만점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한 아동교육 전문가는 그러나 “현재의 영어 열풍은 부모의 뜻에 따라 특목고에 입학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며 “학생 스스로의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다 보면 과중한 학습량에 짓눌린 아이들이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기 쉽다”고 지적했다.

영어 학습도 양극화

민사고 입시 전문인 Y학원은 커리큘럼에 영어가 빠져 있다. 영어는 최소한의 자격일 따름이다. 상당수가 자유토론과 모든 주제의 에세이 작성이 가능할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이모(15ㆍ중3)군은 “다섯 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녔고 6학년 겨울방학에 토플 준비를 끝냈다”고 말했다.

입시 컨설턴트 이모(42ㆍ여)씨는 “3년 전만 해도 일류대 진학은 중2때 결정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초등 4학년이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특목고 입시는 4학년 때 웬만한 영어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사실상 준비가 불가능한 구조로 짜여 있다.

고득점은 ‘재력’이 반영된 결과다. 영어 선행학습은 조기유학이나 해외연수와 맥을 같이해 부(富)의 양극화가 자녀들의 영어 실력 양극화로 이어진다.

영미(英美)권으로 해외 영어캠프를 갈 경우 비용이 보통 800만~1,000만원(6주 기준)이다. 외고 전문 J학원의 최상위 클래스 수강생 15명 중 13명은 부모가 기업의 해외 주재원이었거나 조기 유학파다.

영어 열풍은 학년 파괴로 이어져

22일 오후 강남구 도곡동 S어학원. “언니, ‘불능화’가 영어(disablement)로 뭐게?” “…” 두 여학생(초등6, 중2)이 ‘북핵’과 관련해 나눈 영어 퀴즈의 일부다.

I학원이 소수 정예로 운영하는 영어회화반에는 중3, 중1, 초등 5학년이 함께 수업을 받는다.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3명 모두 토플 240점 이상에 영어 토론을 할 수 있다. 중3인 최모(15)군은 “오히려 어린 친구들이 외국에서 오래 살아 발음도 좋고, 그 쪽 문화도 잘 이해해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선행학습을 통한 영어 조기 교육은 ‘학년 파괴’라는 신조어를 낳았다. 학원 강사 김모씨는 “영어만큼은 같은 학년이 함께 공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단언했다. 학년간 실력차보다 개인별 수준 차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학년 파괴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교육 현장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종로구 C초교 손모(24ㆍ여) 교사는 “학교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학원의 과중한 수업도 따라가지 못해 아예 공부에 흥미를 잃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며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선행학습은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파구 J초교 최모(44) 교사는 “해외체류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학원에서 언니ㆍ오빠들과 함께 공부하는 걸 자랑하고, 심지어 영어로만 말할 때도 있어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김이삭기자 hiro@hk.co.kr

■ 국어·사회도 예외 아니다

“0부터 9까지 숫자를 디지털 모양으로 쓸 때 0부터 2006까지 수 중에서 180도 회전시켜도 다시 원래 수가 되는 것은 몇 개인지 서술해보세요.”(P학원 초등용 수리논술 대비 문제-정답:55개)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조모(41ㆍ회사원)씨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풀던 창의수학 문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답은 고사하고 문제를 이해하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조씨는 “공식을 외워 답을 구했던 우리와는 너무 달랐다”며 “아들의 공부를 도와주려다 망신만 당했다”고 말했다.

영어에서 시작된 선행학습 붐이 수학과 과학 등 전과목으로 확산되고 있다. 모든 과목에 걸쳐 한학기 정도 먼저 배우는 건 보편화됐다.

대치동 학원가의 특목고반 학생들은 수학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중1 과정을 마치고 중2때 고1 과정을 마스터한다. 대치동 수학전문 P학원 강사 최모씨는 “민사고나 과학고 지망 학생들은 중2때 수학능력시험의 수학 문제는 풀 수 있는 실력”이라고 말했다.

수학은 영어만큼 조기교육 열풍이 거세다. 대형 학습지 회사들은 유치원생 대상 수학 교재를 내놓은 지 오래고 수학과 과학 전문 H교육은 만5세부터 시작하는 주니어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하지만 단순히 수학과 과학만을 잘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대치동 H학원 이모(33) 강사는 “수학을 어렵게 느끼는 건 난이도가 아니라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실제 종합적인 사고력을 묻는 창의수학의 경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어와 사회 등도 선행학습해 어휘력과 관련 지식을 쌓아야 한다.

입학전형에서 내신비중이 높아진 것도 선행학습을 부추긴다. 특목고는 중2와 중3 1학기 내신성적이 당락을 가를 수 있어 한 과목도 소홀이 할 수 없다.

학교의 시험 행태도 문제다. 일선 교사들은 변별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교과 과정에서 벗어난 문제를 출제하곤 한다. K고 1년생 이모(17)군은 “선행학습없이 학교 교육만으로는 좋은 내신 성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손재언 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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