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내용을 포장하는 형식으로서의 수사학은 더 이상 버려야 할 껍데기가 아닌, 소중한 진리의 속살을 보호하는 막이다. 껍데기는 오라, 어서!”
한국수사학회 양태종(동아대) 회장의 말이다. 진중함과 내실을 미덕으로 여기는 학계에서 표현과 설득을 중시하는 수사학이 부상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연구자들의 모임이 결성됐을 만큼 국내 수사학 역사는 일천하지만 학제간 협력, 사회적 응용에선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 수사학이란
수사학은 기본적으로 ‘말의 학문’이다. 연구 주제는 크게 ‘텍스트 생산 모형’과 ‘텍스트 분석’으로 구별된다. 대중 연설에 한정해 말하자면 전자는 연설문을 만드는 기술, 후자는 연설문의 설득 전략을 연구하는 것이다.
서구 수사학은 연원이 깊다. 변호사 제도가 없던 고대 그리스에서 소송 당사자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려 변론가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수사학이 발전했다는 게 정설이다. 애초 이 학문이 ‘말 잘하는 기술’과 연관 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발흥지인 유럽에서는 1960년대 수사학이 재차 융성하면서 단순한 연설·웅변 차원을 넘어 광고, 시각매체, 무의식 등 여러 분야로 발을 넓혔다. 현대 수사학계를 주도하는 미국은 1806년 하버드 대학을 필두로 많은 수사학과를 설치, 일찌감치 독립 학문의 기반을 닦았다.
▲ 주요단체
한국수사학회는 2003년 10월에 창립됐다. 2000년 7월 수사학 고전과 주요 이론서 연구를 위해 10여 명의 학자들이 결성한 ‘수사학연구회’가 그 전신이다.
지금은 양태종, 박우수(한국외대), 박성창(서울대) 교수 등 수사학 전공자를 비롯, 58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린 대표 학회로 성장했다. 매년 두 차례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작년 11월엔 ‘비교수사학-아시아와 서구’를 주제로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곳에서 내는 반년간지 <수사학> 은 국내 유일의 관련 학술지다. 수사학>
수사학회가 정교한 이론 정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재작년 발족한 고려대 레토릭연구소는 학문의 현실 적용에 적극적이다. 연구소는 이를 위해 인문학ㆍ정치ㆍ비즈니스ㆍ의료 등 4개의 작은 연구소를 두고 있다. 이 중 의료연구소의 활동이 가장 활발해 작년 9월 ‘의료커뮤니케이션학회’를 창립하는 성과를 거뒀다.
학회 회장인 유형준(한림대 의대) 교수는 “환자-의사 간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수사학, 대화학 등 전문 분야의 협조가 절실했다”며 설립 이유를 밝혔다. 이 학회는 이달 30~31일 ‘맞춤형 의료 커뮤니케이션’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 수사학의 대중화
대학에선 수사학 강좌가 속속 늘어나고 있다. 96년 첫 학부 강좌를 개설한 동아대의 경우 이번 학기 수강생이 2,000명에 달할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엔 고려대, 한국외대, 수원대 등에도 관련 강의가 생겼다.
수사학 서적 출간도 부쩍 늘었다. 로마시대 최고 웅변가로 꼽히는 키케로의 고전이 한국키케로학회(회장 허승일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에 의해 활발히 번역되고 있다. 이달 초엔 과학 이론의 성공 비결이 레토릭에 있다는 내용의 <과학의 수사학> (궁리)이 나와 관심을 끌었다. 과학의>
수사학의 응용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TV 등 대중매체가 발달하면서 표현과 소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토릭연구소 이영훈 교수는 “수사학은 광고학ㆍ신문방송학ㆍ심리학ㆍ교육학 등에 두루 활용되고 있다”며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로스쿨을 준비하는 몇몇 대학에서 수사학 강좌 개설 지원을 요청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