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더미를 이룬 쓰레기를 헤치고 집안에 들어선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화장실 문 아래 쪽에 직경 50㎝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끌 따위 도구로 뚫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발로 걷어차서 생긴 구멍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옆의 냉장고에 매직으로 커다랗게 씌어진 '인내'라는 검은 두 글자였다. 도대체 화장실 문에 난 구멍과 '인내'라는 글자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방안 가득한 냄새조차 잊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생각에 잠겼다. … 유품 정리를 부탁한, 형이라는 사람은 끝내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 일본 최초의 '유품 정리인'인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ㆍ43)가 지난해 낸 《유품 정리인은 보았다!》의 한 구절이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요리사 수업을 받고 21살 때 도쿄에 가게를 열었다. 얼마 안 있어 택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스스로 이삿짐센터를 열었다.
이사할 때마다 멀쩡한 물건이 수없이 버려지는 걸 보고 '재활용품점'을 열기도 했다. 2002년 일본 최초의 유품 정리 전문회사인 '키퍼스'를 설립한 후 일본 전국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자신이 목격한 고독사의 모습을 그린 《유품 정리인…》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일본에서 자주 화제가 돼 온 고독사는 우리에게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1월 충남 천안에서는 숨진 지 1년이 넘은 60대 노인이 발견됐다. 백골이 다 된 시신은 고독사가 이미 한국사회의 한 단면임을 보여주었다. 고독사 경험에서 우리를 한참 앞선 일본에서는 다양한 조기 발견 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우유나 요구르트 배달원, 매일 찻물을 끓이는 생활습관에 착안한 가스회사의 자동점검 시스템 등이 두루 활용된다. 국내에서도 지방자치체의 도우미 파견이 일부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손길이 많이 부족하다.
■ 유품 정리인의 일은 외롭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남긴 물건이나 가재도구를 정리ㆍ처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통장 정리 등 금융 문제, 채권ㆍ채무 관계, 상속이나 상속포기 등의 법적 절차 등을 모두 맡아서 처리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의 깔끔한 뒷정리라는 점에서 가족 붕괴가 현저할수록 의미가 커진다. 이 때문에 이런 새로운 직종, 새 일자리가 생겨나는 현실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러나 떠난 사람이나 남은 사람 모두에게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는 점에서 조만간 국내에서도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하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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