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무엇엔가 마술을 걸어보고 싶었던 경험이 있었으리라. 정말 간절하게 원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마술을 통해 현실로 걸어 나온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일루셔니스트> (닐 버거 감독, 2006)의 주인공 아이젠하임은 마술사다. 그는 오렌지 씨앗의 싹을 틔워 순식간에 나무로 자라도록 만들 수 있다. 홀연 등장한 나비가 여인네의 손수건을 사뿐히 들고 날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자신의 사랑을 마술을 통해 쟁취했다. 일루셔니스트>
아이젠하임의 그녀는 넘볼 수 없이 지체 높은 공녀 소피. 어린 시절 만나 사랑을 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아이젠하임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세월이 흘러 아이젠하임은 환상마술의 달인, 일루셔니스트가 되어 돌아와 마술쇼를 연다. 마술쇼를 보러 온 소피와 그의 약혼자 레오폴드 황태자. 둘 사이를 의심한레오폴드의 칼에 소피는 죽는다. 마술은 지금부터.
아이젠하임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는 마술쇼를 시작하고 불려나온 소피의 영혼이 많은 관중들 앞에서 황태자가 자신을 죽였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황태자는 궁지에 빠져 죽음을 택하고 소피는 살아 돌아와 아이젠하임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것이 마술인지, 로미오의 묘약인지, 아니면 단순한 속임수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그녀를 얻었다.
레오폴드는 아이젠하임과 소피의 관계만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아이젠하임의 마술 자체를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의 눈을 통해서 아이젠하임이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밝혀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마술에 대한 레오폴드의 태도는 그의 성격이나 놓인 상황을 제거하면 과학적인 태도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근대과학은 이성과 합리주의, 그리고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무기로 그 이전에 팽배해 있던 비과학적인 혹은 마술적인 세계관을 뒤엎었다. 아이젠하임과 레오폴드의 대립처럼 마술과 과학이 서로 맞섰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술사는 과학으로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과학의 역사는 비합리적인 것을 인간의 지식 목록에서 하나씩 지워 간 역사로 기록해 왔기 때문에 근대과학이 태동하던 무렵, 마술과 과학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은 생각보다 많이 마술에, 혹은 마술을 부려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근대과학을 이루는 한 축은 널리 알려진 대로 엄밀한 수학적 방법이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이 수학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얻어낸 천체와 지구의 운동에 대한 기술이 근대과학의 모태가 되었다. 또 다른 한 축은 실험적 방법이다.
실제로 어떤 가설을 만들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험하기도 했고 여러 번 반복한 실험을 통해서 얻은 결과들을 토대로 일반적인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근대과학 중에서 특히 화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분야의 성립에는 수학적 방법 못지않게 실험적 방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험적인 방법은 그 뿌리가 연단술, 혹은 연금술에 닿아있다.
불로장생을 위한 약을 만들려고 했던 연단술이나 보잘 것 없는 쇳조각, 혹은 돌조각으로 금을 만들어 보려던 연금술은 마술사의 작업과 이미지가 겹친다. 연금술사들은 오랜 세월 동안 온갖 물질들을 가열하고, 녹이고 증류하면서 황금을 꿈꾸었다.
비록 그들 중에서 꿈을 이룬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작업의 부산물로 여러 가지를 얻었다. 알코올, 에테르, 아세트산, 질산, 황산, 왕수, 백반, 염화암모늄, 아연과 수은의 염류, 질산은, 비누, 알칼리 등의 물질들을 분류했고 그들의 성질을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도가니, 증류기, 플라스크, 여과기 등의 실험기구를 화학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래서 루돌프 글라우버가 1648년에 연금술사의 집을 사들여 당대의 기준에서 최신 화학 실험실로 개조한 일을 연금술에서 화학으로 이행한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시대이든 여러 가지 생각들이 존재한다. 서양의 중세를 흔히 신학의 무게에 다양한 생각들이 질식해버린 시대라고 여기지만, 교황청이 이단이라고 규정한 많은 생각들과 부단한 싸움을 벌여야 했음을 돌이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더구나 르네상스를 거쳐 과학혁명에 이르는 기간은 백가쟁명의 시대였다.
신학의 권위가 흔들리자 어떤 이의 어떤 주장도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근거를 갖지 못했다. 고대의 사상들이 다시 부활했고 마술이나 비학(秘學)의 지식들도 여기저기에 섞여 들었다.
극단적인 회의주의까지 합세해서 지식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던 시기였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이런 혼란 속【?사람들이 느슨한 회의주의에 합의하는 과정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상황이 이랬으니 당시의 다양한 사상적 요소들이 새로이 형성된 근대과학에 유입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피의 순환 이론을 정립해서 피가 간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몸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의 펌프질을 통해 계속 순환한다는 것을 밝힌 하비가 그런 생각을 한 배경에는 태양을 중시한 신플라톤주의의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근대과학의 정초를 세운 사람이라고 불러 마땅한 뉴턴이 연금술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이성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는 것들을 과학으로부터 발라내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활동의 내용이 되었다. 이것이 과학과 마술이, 혹은 신비주의적인 생각들이 결별하게 된 전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이별을 통해 과학이 마술적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분과들이 잘게 나뉘고 그 벽을 넘어 큰 틀에서 사고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현대 과학에게 우주와 감응하는 마술의 상상력이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요즈음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학문 사이의 경계 넘기도 크게 보고 넓게 생각하는 상상력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과학평론가ㆍ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 주일우
■ 뉴턴도 연금술에 몰두… 생물체 만들 생각도
근대 과학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은 수학, 광학, 중력, 물체의 운동 등과 관련해서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유명한 작업들과 어울리지 않지만 뉴턴은 연금술에도 열심이었다.
그가 남긴 연금술에 대한 수고가 발견된 것은 그가 세상을 뜬 직후인 1727년이었지만 한 번도 그 내용이 일반에게 공개되거나 제대로 연구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1936년에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12파운드의 가격에 거래된 이후 사라졌던 연금술에 대한 뉴턴의 수고가 다시 발견된 것은 2005년. 왕립학회의 문서보관소를 정리하던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수고의 대부분은 다른 연금술사에 대한 뉴턴의 생각을 메모한 것이지만 그 중 한 페이지는 연구자들을 흥분시키기 충분한 것이었다. 여기서 뉴턴이 무가치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비밀, '바질리스크 도마뱀', '인조 소인'과 같은 인공적인 생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언급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뉴턴은 당대의 유명한 연금술사들을 따라 스스로 그들의 실험을 따라 하기도 했다. 납을 금으로 바꿔보려고 했던 뉴턴의 시도와 실패가 수고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뉴턴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1404년 이래로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을 만드는 일이 중범죄로 취급되어 비밀리에 행해져야 했던 탓도 있고 연금술사들의 기록이 알아보기 힘든 은어와 기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던 탓도 있다.
뉴턴 이외에도 왕립학회의 회원이었던 많은 과학자들이 연금술에 심취했었다는 증거가 제법 있다. 이들이 현재의 과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연금술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은 현재 우리가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기준이 근대과학의 형성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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