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S대 3학년 이모(22)씨는 1학년 때부터 학생수첩을 받으면 각종 공모전 일정부터 적었다. 지금까지 총 6번 응모했고, 앞으로도 경험을 쌓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원할 계획이다. 이씨는 “아직 수상실적이나 뚜렷한 관심분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취업 압박감 때문에 꾸준히 응모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케토톱 광고 공모전’ 대상을 수상한 서울 Y대 경영학과 3학년 이모(26)씨는 20여 차례 응모해 10회의 수상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주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광고 공모전에 관심이 많다. 그는 “공모전 타율 3할이면 수위타자”라며 “공모전 참여가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학비에도 큰 보탬이 된다”고 말했다.
대학생들의 공모전 응모 열풍이 뜨겁다. 각종 공모전은 과거 끼 있는 소수 학생들의 도전 분야였지만, 이젠 대부분 학생들이 학창시절 거쳐야 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전공이나 관심 분야와 관계 없는 ‘묻지마 도전’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4명 꼴로 공모전 응모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설문조사 참여 대학생 313명 중 38.0%(119명)가 ‘공모전 응모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며, ‘앞으로 도전해볼 의사가 있다’는 경우도 18.6%에 달했다.
대학생들이 공모전에 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취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공모전 입상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학생의 47.1%가 ‘어느 정도 된다’, 31.7%는 ‘많이 된다’고 답해 78.8%가 긍정적 의견을 보였다. 상금을 통해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등록금이 매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어 수십~수백만원의 공모전 상금은 ‘짭짤한’ 수입원이다. 실제 수상 경력자 대다수가 “용돈벌이 목적으로라도 꾸준히 도전할 생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공모전에 대학생들을 끌어들이려는 기업들의 유인책도 다양해지고 있다. 상금과 사내 인턴 기회 부여는 기본이다. 기업에 따라 입사 때 서류전형 면제 및 가산점 부여, 해외연수 기회 등도 주어진다. 취업이 제1 관심사인 요즘 대학생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권위 있는 광고 대행사나 공기업이 주최하는 광고 공모전에는 특히 많은 학생들이 몰린다. 전문적 지식이 요구되는 논문ㆍ디자인 공모에 비해 일반 학생들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쉽게 지원할 수 있는데다 상금도 많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너나 할 것 없이 “일단 출전하고 보자”는 심리가 대학가에 팽배하다. 10번 이상 참가해 봤다는 대학생 박모(26)씨는 “공모전은 살아 있는 학습이다. 해당 주제와 기업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어 전공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마구잡이식’ 응모 열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단순히 경험을 쌓기 위해 관심도 없는 분야에 무분별하게 지원하는 것은 ‘시간낭비, 체력낭비’라는 것이다. 실제 취업 지원분야와 무관한 공모전 참가나 수상경력은 입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일반적인 의견이다. 취업 경력관리 포털 ‘스카우트’가 구직자와 직장인 58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공모전 참가자 중 입사 때 혜택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34.5%에 그쳤다.
기업들도 공모전 참가횟수가 지나치게 많은 입사 지원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입사 후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면서 주업무를 소홀히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 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공모전 입상 경력에 가점을 주기는 하나 입사의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크지는 않다”며 “지원 분야와 관련 없는 수상실적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공모전의 그늘/ 학업 뒷전 공모전 폐인에 대행업체까지
1990년대 말 공모전이 대중화하면서 공모전 시장은 매년 비약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개최된 공모전은 1,600여건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모전 홍수' 시대를 맞아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4년제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한 김모(29)씨는 올해 한 사이버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대학생 대상의 공모전에 계속 출전하기 위해서다. 김씨의 목적은 경력도 경험도 아닌 상금이다. "대기업 공모전의 경우 많게는 1,000만원이 넘는 목돈을 쥘 수 있다"는 게 도전 이유다. 업계에선 김씨처럼 수 차례의 입상 경험을 무기로 상금만을 노리는 '공모전 사냥꾼(contest hunter)'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모전을 맹신해 학업을 등한시하는 '공모전 폐인'도 생겨나고 있다. 성균관대에 다니는 김모(24)씨는 지난 학기 공동과제를 수행해야 할 팀원이 공모전을 핑계로 참여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김씨는 "졸업 전 마지막 공모전이라며 통사정을 해 어쩔 수 없었다"며 "공모전을 취업 성공의 보증 수표인양 여기는 풍토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공모전 열풍을 틈타 전문 대행업체도 성업 중이다. 이들 업체는 공모전 성격에 따라 필요한 작품이나 디자인 설계를 제공해 준다. 아예 ▦단체전 작품 제작 ▦도면설계 대행 등 분야를 세분화해 특화한 업체도 있다. 각 업체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보수는 확실히 줄 테니 작품 제작을 대신해 달라"는 대학생들의 댓글이 빼곡하다.
수요가 많다 보니 함량 미달의 공모전도 남발되고 있다. 올해 1월 한 달 여에 걸쳐 진행된 국가지식포털 애칭 공모전에는 수만 명이 몰렸지만, 주최 측은 "당선작이 없다"며 발표를 차일피일 미뤘다. 응모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사전 공지를 안 해 일어난 착오일 뿐 책임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취업포털 '사람인'의 신길자 홍보팀장은 "사용자제작콘텐츠(UCC)나 휴대폰 등 이색 마케팅의 등장으로 공모전 범위는 더욱 확대될 것"이라며 "도전자 스스로 적성과 목표에 맞는 양질의 공모전을 택해 정정당당한 태도로 경쟁에 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정우 기자 wookim@hk.co.kr이경진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3년)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