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 지음·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발행·202쪽·9,800원
부자 간 대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머리에서 아들은 “한 쪽에선 음식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데 왜 다른 곳에선 아이들이 굶어 죽느냐”고 따지듯 묻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이 예사롭지 않다. 어린 아들의 순박한 울분을 달래주긴커녕 그 살풍경의 원인을 냉정하게 짚어가기 시작한다.
농사짓기 좋고 종족 갈등도 없는 소말리아가 기근으로 ‘시체의 산’을 이루는 건 군벌들의 다툼 때문이다. 구호단체 화물선이 정박할 항구는 전쟁통에 폐쇄됐거나 통행세를 요구하는 무장세력으로 득실댄다. 사회주의와 함께 국가 보장체제가 붕괴한 러시아, 동유럽 국가에서도 많은 이들이 가난에 내몰렸다.
유럽ㆍ북미와 비슷했던 러시아 국민의 평균수명은 1997년 조사에서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보다 낮아졌다. 99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상황이 절박한 3,000만명을 포함, 세계 기아 인구가 8억2,800만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신속한 식량 배급 체계를 갖추면 되지 않느냐는 아들의 조바심에도 아버지는 고개를 젓는다. 해당 정부들의 행정 소홀로 기아 실태 파악이 쉽지 않아 지원 인력 및 물품 도달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
게다가 긴급 구호 활동을 하려면 의료 전문가부터 확보해야 한다. 영양실조가 심각한 사람에게 정밀한 진찰 없이 무턱대고 음식을 먹였다간 건강이 더 나빠질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 세계식량계획(WFP), FAO 등 구호의 선봉에 선 국제기구들의 재정 상태가 엉망이다. 곡물 투기꾼들의 농간에 부풀려진 식량 가격은 가뜩이나 자금이 부족한 이들 기관을 괴롭힌다.
빈곤 문제에 천착하는 사회학자이자 정력적 구호 활동가인 아버지 즉 저자의 관록은 “기아의 원인에 자연 재해, 정치 부패, 시장가격 조작 말고 또 뭐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그는 제 잇속을 위해 굶주림을 조장하는 세력들의 정체를 까발린다.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려 10년 넘게 이라크 경제봉쇄 정책을 취한 미국, 혹독한 노동과 굶주림으로 정치범을 제거하는 북한 등은 기아를 무기, 테러 도구로 악용한 국가들이다.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칠레 아옌데 민주정부의 분유 무상 배급 공약 때문에 시장 독점권 상실을 우려한 스위스 회사 네슬레는 이 정부를 전복하려는 미국 닉슨 정부에 적극 협력했다. 분유 공급로를 틀어쥔 네슬레의 횡포는 아옌데 정부 붕괴에 큰 기여를 했고, 이 나라 수 만 명의 아이들은 또다시 배고픔에 시달리게 됐다.
서아프리카 소국 부르키나파소를 자급자족 기반에 올려놓았다가 프랑스의 견제로 암살 당한, 청년 혁명가 상카라와의 교우를 추억하는 저자에겐 기아 문제와 투쟁하며 느끼는 피로가 설핏 비친다.
하지만 이 백전노장은 다시금 희망을 외친다. 그는 “각국이 자립 경제를 스스로 이룩하는 것만이 굶주림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며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 사회구조를 뒤엎어야 한다”며 진정한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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