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난 순전히 니코스 카잔차키스 때문에 그리스를 다녀왔다. 거기에서 내 혼돈의 젊은 날, 내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현대의 치명적 문제는 무엇일까. 관계성의 상실이 아닐까. 인간은 서로에 대해 이익적 관계, 실용적 관계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우정, 사랑, 친밀함과 공감, 이런 것들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면서부터 자연과 인간의 진정어린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희생, 신성, 초월을 통해 도달하는 참다운 관계 말이다.
이런 관계가 가장 잘 이루어진 시대는 원시시대가 아니었을까. 알타미라 동굴에서 사냥할 소를 그려놓고 제의를 지내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는 그 소를 신으로 경배하고 축제를 벌이던, 희생과 신성과 초월을 이룬 그 원시성.
내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는 모든 쓸데없는 문명화한 기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던 젊은 시절,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게서 그 원시성을 보았다.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인 조르바는 분명 문명에 대한 반항아다. 그는 의식이나 이성(문명적 기준)의 규제를 받지 않고 본능(자연성)을 거침없이 표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 대해 흔히들 말한다. 반윤리적이라고. 하지만 웬걸, 책을 읽어갈수록 조르바야말로 진정한 윤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윤리성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에 맥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문명에 대한 반항아 조르바는 젊은 날의 나에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을 보여준 나의 애인이었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의 OST를 들으며 나는 오늘도 조르바처럼 허공을 애무하며 춤을 춰본다. 그리스인>
강맑실ㆍ사계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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