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에 치이고, 전임자에게 눌리고….
벤 버냉키(54)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최근 '사면초가' 신세다. 향후 미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잇따르는 가운데 버냉키가 이끄는 FRB가 지나치게 물가안정을 중시해 경기 진작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엘리트 학자 출신으로 지난해 2월 FRB 의장에 오른 버냉키는 중앙은행이 소비자물가 상승률 목표를 정하고 이에 맞춰 통화정책을 시행하는 '물가관리목표제'(인플레이션 타겟팅)를 FRB에 도입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FRB는 현재도 1~2%의 물가안정 범위를 설정하고 있지만, 이를 보다 명시적 목표로 상정해 금융시장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시장의 급변동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냉키는 지난해 7월 자신과 '인플레이션 타겟팅'이란 책을 공동 저술한 프레드릭 미시킨 콜럼비아 대 교수를 FRB 이사로 영입하는 등 물가관리목표제 도입을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전통적으로 미국 내수경제를 중시해온 민주당이 상ㆍ하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버냉키의 행보는 큰 장애에 부닥치게 됐다.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은 "FRB는 물가통제뿐 아니라 경제성장 촉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공공연하게 물가안정목표제 도입에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전임 FRB 의장인 앨런 그리스펀도 최근 "미국 경제가 올 연말부터 침체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는 "미국 경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바꿀 이유가 없다.
미국경제는 안정성장을 지속하고 있다"는 버냉키의 언급을 정면 반박하는 것. 미국의 여론은 버냉키의 낙관론보다 그린스펀의 경고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형국이다.
12일 블룸버그 통신은 "1960년 이후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7번 벌어졌는데 그 중 6번의 경우 경기침체에 빠졌다"며 "현재의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 등을 감안하면 향후 미국 경기침체 가능성을 30%로 예상한 그린스펀의 전망이 오히려 낙관적"이라고 경기 침체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버냉키를 지지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그린스펀이 재임시절 지속한 저금리 정책이 전세계 자산버블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부작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데, 버냉키의 물가 중시 정책은 이런 문제점을 바로 잡는 치유책이라는 것이다.
취임 1년을 갓 넘긴 버냉키 의장은 지금 정책뿐 아니라 성장과정이나 화술 등 여러 면에서 그와 대조적인 그린스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신을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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