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사진) 삼성그룹 회장이 달라졌다.
기업경영과 직접 관련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끼던 그 동안의 모습과는 달리, 언론과 맞닥뜨릴 때마다 작심한 듯 한국경제의 위기를 강조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이 회장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돌파, 그룹을 한단계 도약시키기 위해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며 신경영을 제창했을 당시처럼 뭔가 중대한 결심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좌우명은 고 이병철 회장이 물려준 ‘경청’이다. 실제로 발언하기 보다는 주로 듣는다. 그 동안 언론과의 접촉이나 대외적으로 오픈된 활동도 가급적 자제해 왔다.
하지만 올들어 확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 때부터 언론과 거리낌없이 만나더니,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경영권 승계, 전국경제인연합회 차기 회장 추대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적극 나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이 방문했을 때는 손수 사전에 코스를 점검하고, 스키도 직접 타보는 등 열과 성을 다했다.
스타일의 변화 못지 않게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메시지의 톤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이 회장은 9일 “삼성의 주력업종 수익률 저하가 아주 심각하다. 삼성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문제다.
앞으로 5~6년 후에는 아주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1월 전경련 회장단 회의 후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샌드위치 신세”라고 말하던 것보다 한층 발언 수위가 높다.
올들어 이 회장의 달라진 언행에는 93년 신경영 선언 때보다 더한 위기감과 고민이 배어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삼성은 반도체 수익률도 예전같지 않고, 휴대폰도 노키아의 약진과 소니 에릭슨의 추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그룹 관계자는 “93년 신경영 주창 때도 주력이 반도체였다면, 1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반도체”라며 “시급하게 새 성장동력을 찾아 재도약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회장도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올들어 처음 유럽과 중국을 잇달아 방문, 현지사업을 직접 챙길 예정이다. 이 회장은 “유럽에 한달 가까이 머물다 곧바로 중국으로 이동할 계획”이라며 “유럽 휴대폰 시장 경쟁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만큼 현지시장을 점검해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93년 6월 신경영을 발표했던 프랑크푸르트도 방문할 것으로 알려져 어떤 대응 전략을 내놓을 지 관심을 모은다. 93년 도쿄 LA 프랑크푸르트 등의 해외 사업장을 68일간에 걸쳐 방문한 끝에 ‘신경영’을 선언했던 것과 흡사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당시 발표된 신경영은 저가의 물량위주 수출 대신 품질이 우수한 일류제품 생산, 판매에 주력, 질적 도약을 이루자는 것으로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때마침 올해는 이 회장이 취임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여서 새로운 전환점이 모색될 만하다.
박진용기자 hu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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