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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신라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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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신라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

입력
2007.03.09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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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지음 / 푸른역사 발행ㆍ384쪽ㆍ1만4,000원

<삼국유사> 에는 신라 전성기 때 왕경(경주)에 17만8,936호(戶)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 집에 다섯 명이 산다고 가정하면 당시 인구가 90만 명에 육박한 것인데 고대 도시 가운데 그 정도 인구를 가진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인구를 호로 잘못 기록한 것 아닌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조선시대 한양에 4만~5만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전인 신라의 왕경에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8, 9세기의 왕경은 사방 약 5.5㎞의 작은 도시여서 이 정도 인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다.

이기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은 그 같은 통념에 반기를 든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반도의 인구가 증가-축소-회복을 거듭했으므로 한양이 신라 왕경보다 인구가 많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왕경이 사방 5.5㎞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가 쓴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은 신라 수도 경주의 역사성과 경주인에 대한 이야기다.책이 특히 주목한 것은 극단적인 중앙집권화다. 제도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저자가 답사하면서 확인한 신라의 석탑에서도 중앙집권화가 드러난다. 즉 지방색이 잘 드러나는 고려 석탑과 달리 신라 석탑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저자는 그것을 만든 장인 대부분이 경주에 살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중앙집권화는 인구의 경주 집중화를 야기했는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동남아 등의 수입품으로 장식품을 만들고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의 금입택(金入宅)이 39채나 될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중앙집권화는 지방 세력의 출현을 봉쇄했지만 그 통제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귀족의 암투와 가뭄이 겹치면서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 지방 출신의 불만이 폭발하고 급기야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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