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봉 지음 / 푸른역사 발행ㆍ384쪽ㆍ1만4,000원
<삼국유사> 에는 신라 전성기 때 왕경(경주)에 17만8,936호(戶)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 집에 다섯 명이 산다고 가정하면 당시 인구가 90만 명에 육박한 것인데 고대 도시 가운데 그 정도 인구를 가진 곳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인구를 호로 잘못 기록한 것 아닌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삼국유사>
조선시대 한양에 4만~5만호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전인 신라의 왕경에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8, 9세기의 왕경은 사방 약 5.5㎞의 작은 도시여서 이 정도 인구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도 한 이유다.
이기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은 그 같은 통념에 반기를 든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한반도의 인구가 증가-축소-회복을 거듭했으므로 한양이 신라 왕경보다 인구가 많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왕경이 사방 5.5㎞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가 쓴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은 신라 수도 경주의 역사성과 경주인에 대한 이야기다.책이 특히 주목한 것은 극단적인 중앙집권화다. 제도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저자가 답사하면서 확인한 신라의 석탑에서도 중앙집권화가 드러난다. 즉 지방색이 잘 드러나는 고려 석탑과 달리 신라 석탑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저자는 그것을 만든 장인 대부분이 경주에 살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고대도시>
중앙집권화는 인구의 경주 집중화를 야기했는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동남아 등의 수입품으로 장식품을 만들고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뜻의 금입택(金入宅)이 39채나 될 정도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중앙집권화는 지방 세력의 출현을 봉쇄했지만 그 통제가 영원할 수는 없었다. 귀족의 암투와 가뭄이 겹치면서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 지방 출신의 불만이 폭발하고 급기야 견훤은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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