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 <스탈린, 강철 권력> 에 따르면, 이 공산당 우두머리가 죽은 뒤 그의 별장에서 비밀 편지 세 통이 발견됐다 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탈린과 사이가 나빴던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티토에게서 온 것으로, 그 내용은 이렇다. "이제 더 이상 내게 킬러를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소. 스탈린,>
만일 또 다시 킬러를 보내면, 그 때는 나도 모스크바로 한 사람 보낼 거요. 그리고 나는 두 번째 킬러를 보낼 필요가 없을 거요." 스탈린이 아무리 강심장이었다 해도 움찔했을 테다.
1930년대의 소위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것을 통해 제 동료들을 비정하게 제거한 그의 정치적 리얼리즘으로 보아, 또 멀리 멕시코에까지 자객을 보내 정적 트로츠키를 암살한 그의 '완전주의'로 보아, 스탈린이 제 말을 시답지않게 여기는 티토를 어떤 식으로든 손봐주고 싶어했으리라는 건 그럴듯하다.
● 연임제 개헌은 위험한 시도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 지지자들을 기겁하게 만들었을 즈음, 친구 하나가 내게 이리 말한 적 있다. "고분고분 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저 놈들이 협박한 것 아냐?" 물론 농담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노 대통령의 결기로 보아, 그는 티토가 스탈린에게 맞선 것 이상으로 부시와 단호히 맞섰을 테다.
그런 한편, 노 대통령이 미국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후보 시절의 공언을 뒤집으며 이라크에 한국군을 보낸 것이 미국의 압력에 무릎꿇은 것임도 분명하다. 미국에 아무런 연줄이 없는 국제정치 신인으로서, 노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압력에 무작정 대범할 수만도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라크 파병에 관해서는 노 대통령에게도 이해해 줄 만한 점이 조금은 있다.
그런데 지난해 느닷없이 튀어나온 한미 FTA는? 누구나 알다시피, 이걸 하자고 미국이 주먹을 들이댄 것도 아니다. 협상이 마무리돼 가는 모양새를 보면 이 협정이 다수 한국인들에게 재앙이 되리라는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점점 그럴듯해 보이거니와, 설령 정부 주장대로 한미 FTA가 미래 한국 경제의 복음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추진해온 방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부는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통계자료까지 마구 조작했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공식 사과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한미 FTA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야말로 난데없이 노 대통령이 꺼내든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카드다.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 여론도(한미 FTA에 호의적일 자본가들까지 포함해) 개헌을 하자고 노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은 바 없다. 다수 여론은 연임제 개헌이 필요하되 다음 정권으로 미루자는 쪽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연임제 개헌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더 나아가 매우 위험한 시도다. 한국 정치 상황에서, 대통령 연임제 개헌은 그저 8년짜리 대통령을 만드는 일일뿐이다. 첫 임기 동안 대통령은 자신의 모든 정치적 자산을 오직 재선에 유리하도록 투입할 것이다.
그것은 행정을 크게 왜곡할 것이다. 두번째 임기 동안에는, 지금 개헌론의 한 근거가 되고 있는 조기 레임덕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개헌론의 또 다른 논거인 선거비용 문제도 그렇다. 그 선거비용은 민주주의 비용이다.
● 무력한 정치, 헌법 탓이 아니다
87년 체제의 지양을 운위하며 개헌을 옹호하는 일각의 소리도 실없다. 지난 20년간 한국 정치가 무력했다 해도, 그것은 헌법 탓이 아니었다. 헌정사를 돌이켜볼 때, 4월혁명이나 6월항쟁 같은 민중의 정치적 진출기를 빼면 개헌은 늘 '헌법 개악'이었지 '헌법 개정'인 적이 없었다.
헌법은 정략에 기초해서 만지작거릴 물건이 아니다. 개헌 논의는 판도라의 상자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3ㆍ1운동의 날, 공화국의 최고규범을 만지작거리며 정치적 계산을 하는 공화국 수반을 보는 일은 슬프다. 거둬들여야 옳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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