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문가 K(44)씨는 “여론조사는 과학이고, 숫자는 객관적이라는 미신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2004년 총선 때 수도권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공천을 신청했다가 경선에서 탈락했다.
여론조사 회사가 지역구민에서 표본집단을 뽑고 이틀 뒤 전화조사를 실시해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 전국적 지명도를 가진 그는 사전조사에서 언제나 10%이상 앞서고 있었지만, 정작 당내 경선에선 7%나 뒤졌다.
우리 나라 정당들은 이처럼 여론조사 수치로 공직선거 후보를 선출하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시작은 2002년 11월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의 대선 후보단일화. 여론조사 수치로 대선후보를 결정한, 세계정치사상 최초의 사례다.
방식은 하루 만에 실시한 조사로 0.1% 만 앞서도 이긴다는 OK목장식 결투였다. 결과는 4.6% 차로 노 후보가 승리. 그러나 의혹을 제기해온 정 후보 측은 물론, 노 후보측 실무 책임자들 마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방식에 문제가 있었고, 시기를 며칠 앞당기거나 샘플을 늘렸다면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 인정했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 대한 맹신은 확산되고 있다. 2004년 총선에 이어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각 당에서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결정이 사실상 일반화됐다.
올 대선 후보 선출에서도 한나라당에서 현행 20%인 반영률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유력 후보는 동력을 잃고 곧바로 추락한다.
여론조사는 민심을 측정하는 수단인데, 거꾸로 우리를 대신해 선택을 하고 나아가 시비를 가리는 심판관 노릇을 한다. 그러나 순간의 지지율을 민심의 선택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우민(愚民) 정치란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 박찬욱(정치학) 교수는 “3김 시대에는 정치 보스간 밀실담판과 주고받기로 결정을 내렸다”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한 상향식 정당운영, 과학적 의사결정 방법이 곧 여론조사라고 믿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당의 후보선출 방식은 여론조사의 본질을 모르는 ‘조사문맹(Research Illiteracy)’현상이자, 정치적 선택이 가요인기투표와 같다고 여기는 포퓰리즘”이라며 “노선과 이념에 관계없이 누구든 지지율만 높으면 된다는 풍조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여론조사가 위세에 걸맞게 신뢰할 만한 것이냐에 대한 회의도 많다. 최근에는 맹신풍조에 편승해 ARS(전화자동응답) 등을 이용한 싸구려 과대포장조사와 떴다방식 조사업체가 넘치고 있다.
게다가 20년 이상 여론조사를 발표해온 대형조사기관의 기준도 선진국과 다르다. 미국에선 전화조사의 응답률이 30%를 밑돌면 파기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10~15%, 지방선거의 경우 7%대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업계소식통은 전했다.
공직선거법은 여론조사에서 응답률을 공표하도록 규정(108조4항)하고 있지만, 이를 준수하는 기관은 거의 없다.
단국대 윤석홍(언론학) 교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현재 우리의 여론조사분야는 무법지대나 다름없다”면서 “선거 뿐 아니라 여론조사 전반에 대해 조사의 수준을 평가하고, 조사기관의 윤리준칙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획취재팀= 유승우기자 swyoo@hk.co.kr 이희정기자jaylee@hk.co.kr 김광수기자 rolling@hk.co.kr 문준모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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