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봄이 왔단다. 유난히 따뜻했던 겨울이었기에 그리 간절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봄이 “내가 왔소이다”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은 기온과 색, 두 가지다. 따뜻함이 언 땅과 흰 눈을 녹인다면 무채색의 삭막한 겨울을 지워내는 것은 화사한 신록과 꽃이다.
봄을 여는 꽃은 동백이다. 여느 꽃 피고 지는 봄, 여름을 마다하고 찬바람 부는 겨울 저 홀로 핏빛 선연한 꽃봉오리를 맺는 정열의 꽃이다. 봄의 훈풍이 살랑이는 경남 거제의 지심도로 동백을 만나러 떠났다.
이른 아침 거제 장승포항을 출발한 배는 고요한 바다를 가로지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배의 오른편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인 거제의 해안선이 계속 따라온다.
20분도 안돼 도착한 지심도 선착장. 부두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약간의 경사로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동백이 서둘러 마중을 나왔다. 비탈길을 오르는 수고로움은 만개한 동백의 아름다움에 금세 잊혀진다.
머리 위 동백나무에도, 길 바닥에도, 민박집 슬레이트 지붕과 마당의 널찍한 평상 위에도 붉은 동백이 화려한 수를 놓고 있다. 아침에 청소를 했는지 마당 한쪽에 모아놓은 비질의 부산물도 온통 떨어진 동백꽃 뿐이다.
동백은 두 번 핀다. 진초록의 나뭇잎 위에서 한번 피고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또 한번 피워낸다. 밑동이 붙은 다섯장의 꽃잎이 가장 아름답게 입을 벌린 순간, 꽃봉오리는 ‘툭’하고 통째로 떨어진다. 아무런 미련 없이 스스로 단절하는 그 모습에 누군가 ‘떨어진 동백은 낙화(落花)가 아니라 절화(折花)’라 이야기했다.
갈 짓자로 이어지는 길이 민박집들을 거의 벗어날 즈음 폐교가 나타난다. 옛 지심분교였던 곳이다. 나무로 지은 소담스러운 교사(校舍)와 아담한 운동장이 마음을 빼앗는다. “이렇게 아늑할 수가.” 이곳에도 동백 카펫이 깔렸다. 운동장의 겨우내 바짝 말라붙은 잡초 위로 우수수 떨어져 있는 동백들.
학교를 지나 섬의 북쪽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 깊은 숲속으로 안내한다. 거대한 동백의 숲이다. 수십, 수백 년 된 동백나무들이 세월의 굴곡을 온 몸으로 표현하며 숲의 공간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푹신한 오솔길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 사태에 걸음이 섣불리 나아가질 못한다. 아무도 없는 동백숲. 인적 없어 고요한 이곳에 우두커니 서있으니 속닥거리는 생명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동박새 등 새소리 붉은 동백꽃 위로 퍼져나가고, 댓잎과 동백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엔 초록의 향이 짙다. 봄의 소리, 생명의 울림이다. 굴곡진 동백나무처럼 봄의 울림이 꿈틀꿈틀 숲 안을 맴돌고 있다.
거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세월도 비껴간 섬' 거제 지심도
봄이 이미 붉게 타오르고 있는 섬. 거제 지심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시발점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섬의 생김새가 마음 심자를 닮았다 해서 ‘지심도(只心島)’ 이름이 붙여졌다.
섬은 한 다발의 동백꽃처럼 섬 전체가 동백숲이다. 동백과 해송, 후박나무, 팔손이 등이 섬을 뒤덮고 있는데 수종의 70%가 동백이다.
수십 수백년 먹은 동백이 원시의 모습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군(軍)의 보호’ 때문이었다. 비무장지대의 생태가 살아난 것처럼, 군의 관리를 받는 섬이다 보니 난개발 광풍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 섬에는 조선시대에 주민들이 건너가 살았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일제가 군 주둔지로 삼으면서 주민들은 강제로 쫓겨났고, 해방 이후 다시 건너온 주민들이 섬을 지키고 있다. 현재 15가구 20여 명이 살고 있다.
길을 따라 옹기종기 들어선 민박집들. 주민들은 예전에는 섬을 알뜰하게 개간해 마늘 고구마 유자 밀감 등 농사를 짓고 살았으나, 지금은 모두 손을 놓았다. 최근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민박이나 낚시꾼 대상 식사 등으로 벌이 수단을 바꿨다.
동백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지심도 여행은 동백 외에 많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길이 1.5km, 폭 500m의 작은 섬이기에 길 따라 이리 저리 돌아다녀봐도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은 좁지만 잘 다듬어져 걷기에 무리가 없다. 섬사람들은 뒤에 큰 짐칸을 단 삼륜오토바이를 교통수단으로 삼는다. 선착장에서 각 민박집까지 계단 없는 길이 이어져 있다.
동백숲 터널을 지나 맞는 북쪽 끝의 전망대에서 서면 만경창파의 바다 조망이 시원하다. 거제의 조선소로 부품을 나르는 거대한 화물선을 보는 재미도 심심치 않다. 이곳에서 바라본 지심도 남쪽 절벽이 절경이다. 활처럼 휘어져 바다로 튀어나온 해벽은 투구마냥 빼곡한 해송을 머리 위에 뒤집어 쓰고 있다.
섬의 남쪽, 국방연구소 입구에서 오솔길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면 일제의 흔적을 만난다. 시누대 군락 사이에 동그란 물 빠진 연못 같은 포대 구조물이 3개 있고 벙커로 지어진 탄약고가 하나 있다.
지난해 거제시는 지심도를 관광지로 본격 개발하려고 했다. 이곳에 전시관도 세우고 식물원에 조각공원 등을 조성해 외도와 같은 관광명소로 만들 꿈을 꾸었다.
하지만 환경부의 반대로 벽에 부딪혔다. 난개발이 우려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행이다. 군에 의해 개발의 손길에서 자유로웠던 원시의 동백숲이 당분간은 망가지지 않을 것이기에. 박제되지 않은 원시의 섬, 원시의 숲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심도 가는 배는 장승포항의 장승포항해경파출소 앞 도선장에서 탈 수 있다. 이달 말까지는 오전 8시30분, 낮 12시 30분, 오후2시 30분에 장승포항을 출발한다. 3월부터 10월말까지는 오전 8시, 오전 10시30분, 낮12시30분, 오후2시30분, 4시30분 등 총 5편으로 증편한다. 왕복요금 대인 8,000원, 소인 4,000원.
거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전국 동백 명소 '남도는 지금 온통 활활…'
지심도와 내도, 외도 등 거제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꽃이 북상하고 있다. 거제 지심도 외에 가 볼만한 동백의 명소를 안내한다.
▲ 통영 미륵도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미항 통영의 미륵도도 동백 명소다. 2개의 다리와 1개의 해저터널로 통영과 연결된 미륵도. 바다를 차창에 달고 달리는 23km 해안도로인 산양관광도로 드라이브가 백미다.
길 옆 가로수로 심은 동백이 지금 붉게 타오르고 있다. 도로변 달아공원이나 통영수산과학관은 최고의 낙조 포인트다. 점점이 바다 위에 뜬 섬들 너머로 태양이 지며 동백꽃만큼 붉은 빛을 퍼뜨린다. 용화사와 미래사를 잇는 등산로는 호젓해서 좋다.
▲ 여수 거문도 오동도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한데 품은 여수의 바다는 어느 곳에 서든 절경이다. 여수만, 가막만 등 포근한 바다에 무리 지어 떠있는 섬들을 헤치고 나가 만나는 섬이 거문도다. 19세기 열강의 발길에 채이던 시절, 영국군 무단점령 등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섬이다.
거문도의 동백트레킹은 서도의 유림해수욕장에서 시작된다. 해수욕장을 끼고 산으로 올라 기와집몰랑 능선을 타다가 목넘어로 내려와서는 수월산 벼랑을 따라 100살이 넘은 거문도등대에 이르는, 동백이 붉게 수놓은 길이 환상적이다. 여수 시내와 가까운 오동도는 3만6,000평 되는 작은 섬. 동백나무만 4,000그루 이상 자라는 동백섬이다.
▲ 강진 백련사
‘남도 답사 1번지’인 강진의 다산 정약용의 온기가 남아 있는 만덕산(411m)은 동백산으로도 불린다. 만덕산 품에서 강진만을 시원하게 내려다보는 백련사가 동백 꽃구경의 포인트다.
절 주변 계곡에 300~500년된 7,000여 그루의 동백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어가면 다산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이 있다. 다산초당은 18년간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긴 곳이다. 다산이 당시 백련사 주지인 혜장스님과 차담(茶談)을 나누기 위해 다니던 길이 다산 오솔길이다. 목민심서>
▲ 완도 보길도
보길도에도 봄이 일찍 깃든다.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보길도에서 가장 동백이 좋은 곳은 세연정이다. 윤선도가 머물며 <어부사시사> 를 지었다는 곳. 세연정 주변에 동백나무가 많다. 보옥리의 동백숲도 장관이다. 보옥리 해변은 둥근 돌이 깔린 해변이다. 크기가 사람 머리통 만하다. 그 돌을 휘감는 파도 소리도 그만큼 깊게 울린다. 어부사시사>
▲ 고창 선운사
선운사의 동백은 늦게 핀다. 남녘 동백이 떨어지는 3월에도 일러 4월에야 절정을 이룬다. 선운사 가람 안의 영산전을 거치면 산기슭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동백숲을 만난다.
선운사까지 왔다면 산행을 시도해보자. 도솔암 위 낙조대와 천마봉까지 욕심을 내도 왕복 두세시간이면 족하다.
▲ 서천 마량포구
현재 동백의 북방한계선이다. 전어로 유명한 흥원항 인근의 마량은 서해에서는 드물게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매년 12월31일이면 전국의 해맞이객이 몰려드는 명소. 서천화력발전소 뒤편 동백정 주변에 동백 80여 그루가 군락(천연기념물 제169호)을 이루고 있다. 동백정 앞에는 굵직한 해송숲이 사철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성원기자
■ 거제의 봄마중 '해안 드라이브'
동백은 꽃의 붉은색으로 화려하지만 잎의 빛으로도 찬란하다. 두툼한 진초록 잎이 튕겨내는 봄빛이 지금 거제의 해안도로 위에 난반사되고 있다.
거제도는 조선업의 호황으로 IMF의 한파도 비켜갔던 부(富)의 섬이다. 거제의 봄은 그래서 더욱 풍요롭다. 제주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도는 굴곡이 심해 해안선의 길이(387km)는 제주(263km) 보다 길다. 그 굴곡진 해안선이 거제 관광의 핵심이다. 내해를 끼고있는 섬의 북쪽과 서쪽은 양식장이 지천이라 볼거리가 약하고, 장승포에서 저구에 이르는 외해와 만나는 남동쪽 해안이 절경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이기도 하다.
14번 국도를 타고 떠나는 해안 드라이브의 묘미는 장승포에서 본격화한다. 큰 도로를 벗어나 잠시 장승포와 내포를 잇는 해안도로에 올라탄다. 길이 언덕 위로 높이 올라가면 바다는 더 크게 드러나고, 이를 보는 눈망울은 함께 커진다.
다시 장승포에서 14번 국도를 타고 남으로 달리는 길. 지세포를 지나 와현, 구조라를 향하면서 탄성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한다. 말굽 모양으로 감싸인 와현의 바다는 마냥 아늑하다.
인적 없는 조용한 와현해수욕장에 서면 수묵화를 그려놓은 듯 바다 끝에 해금강의 고운 모습이 드러난다. 와현을 지나 바로 나타나는 구조라해수욕장은 백사장 앞에 떠 있는 윤돌도가 있어 외롭지 않다. 윤돌도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가 뒤덮인 사철 푸른 섬이다. 마치 고둥을 엎어놓은 듯한 이 섬은 간조 때가 되면 거제 본섬과 연결된다. 제법 포실해진 볕을 받은 섬은 더욱 윤기 있게 빛이 난다.
학동몽돌해수욕장은 거제를 대표하는 해수욕장. 멀리서 보면 검은 주단 같은 1.2km 정도의 몽돌해변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몽돌 중 어느 한 돌멩이도 모난 게 없다. 파도의 모진 뭇매에 닳고 닳은 돌멩이들. 이들 돌로 물 수제비를 뜨면 바다의 표면을 잘도 튕겨 달아난다. 몽돌의 파도 소리는 여느 백사장의 소리와 달리 깊고 찰지다.
학동몽돌해수욕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만 달리면 팔색조가 깃든다는 학동동백나무 군락지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동백숲은 빨간 꽃들로 화려하지만 이 숲에는 쉽게 들어갈 수가 없다. 자연휴식년제로 지정돼 일단 2015년까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해금강, 함목몽돌해수욕장, 도장포가 잇달아 있는 갈곶은 경승 집합소. 함목몽돌해수욕장은 학동해수욕장 보다 규모는 작지만 주변 풍경 만큼은 한 수 위다.
도장포 선착장 위의 잔디로 덮인 민둥산이 ‘바람의 언덕’. 바다로 비죽 튀어나온 언덕은 제주의 오름을 닮았다. 뻥 뚫린 시야로 몸과 눈이 시원해지는 곳이다. 이름 만큼이나 바람이 세다. 언덕에 잘 어울리는 벤치는, 그 벤치에 또 잘 어울리는 연인들이 점거하고 있다.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이보다 낭만적일 수 없겠지만, 혼자라면 더욱 가슴을 서늘케 하는 풍경이다.
바람의 언덕 옆 신선대는 눈맛이 더욱 뛰어나다. 다포도와 대소병대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해금강은 갈곶의 끝에 있는 섬. 진시황의 불로장생초를 캐러 온 서불이 이곳에 반해 돌아가지 않고 머물렀다는 전설이 있다. 여유가 있으면 해금강 마을이나, 도장포 등에서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의 십자동굴, 사자바위, 일월봉 등 절경을 즐겨도 좋다
다대 다포를 지나 여차에 이르면 거제 해안 절경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거제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차 하면 여차에 머문다”고 한다. 기다란 몽돌해변이 펼쳐진 여차는 거제의 남쪽 끝 마을. 조용하고 아늑한 바다 풍경이 길손을 불러들인다. 여차에서 홍포로 넘어가는 4km 되지않는 비포장도로가 절경중의 절경이다.
SUV가 아니면 차체의 밑바닥을 다 긁어놓을 험한 비포장 길이지만, 길 바로 옆 벼랑 아래가 보여주는 모습은 천상의 풍경이다. 시퍼런 바다 위에 떠있는 수많은 섬들. 대소병대도와 함께 매물도와 소매물도 어유도 가왕도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해질녘이다. 섬들로 이룬 바다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몽환적이다.
▲ 도다리쑥국으로 봄을 마신다
거제도의 겨울 별미가 물메기와 생대구였다면 봄에는 도다리다.
예부터 가을 전어, 봄 도다리라 했다. 봄을 대표하는 어종이 도다리. 남녘에서는 초봄 도다리쑥국으로 봄기운을 충전한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싱싱한 도다리와 갓 뜯은 쑥을 넣어 끓여낸다.
겨울 땅을 비집고 처음 나오는 쑥은 산삼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야들야들한 도다리의 하얀 살과 쑥냄새 그윽한 시원한 국물이 입맛을 돋우고, 뱃속에 뜨뜻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거제 사람들은 도다리쑥국을 맛 보러 가조도 앞 성포로 자주 간다. 그곳의 평화횟집(055-632- 5124) 등 많은 횟집들이 제철 음식인 도다리쑥국을 내놓는다. 1인분 1만 원.
거제시청 인근의 멍게비빔밥을 하는 백만석(055-637-6660)과 장승포항의 해물뚝배기를 하는 항만식당(055-682-3416)도 유명하다.
거제=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