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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8>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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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명저 50] <8>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입력
2007.02.2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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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 <양반전> 등을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 계급을 조롱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에 대한 일반의 지식은 아마 이렇듯 짧고 단순할 것이다. 그는 분명 대문호이자 당대의 천재였지만, 우리 시대에 연암에 굳이 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소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18세기 인물, 연암은 그만큼 아득한 존재다.

그런 연암이 고전 연구가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고미숙의 연암은 그러나 유머와 역설과 웃음의 인물이다. 시대 상황을 걱정하고 민중의 도탄을 안타까워하는 고뇌의 인간이 아니라,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통 큰 사람이다. 화통해서 막힘이 없고 누구와도 격의 없이 담소했으며, 말술을 들이키고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논쟁이 붙으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았다.

<열하일기> 는 연암이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단에 동행해 1780년 5월부터 10월까지 여섯 달 동안 중국을 다녀 온 이야기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가 2,300리, 연경에서 열하까지가 다시 700리. 장장 3,000리에 이르는 그 먼 길을 일행은 죽기 살기로 걸어나갔다. 찌는 듯한 더위, 몸서리치는 폭우와 싸워야 했던 여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의 연속이었다. 연암은 그 길에서 낯선 경치나 구경한 것이 아니다.

고미숙에 따르면 연암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했고 보이는 것에서 숨겨진 것을 보려 했다. 그의 시선과 필력은 길에서 만난 여인의 장신구와 패션, 머리 모양에서부터 곰이나 범, 온갖 동물의 모양새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연암은 그 곳에서 사람과 만나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선과 악의 근대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

18세기 천재 실학자 연암 박지원 재조명

지식인의 비판적 사유가 향할 길 제시

야음을 틈타 대열에서 이탈, 밤새 술을 마시고 필담을 나누었다. 그런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는 <열하일기> 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이라는 장을 전혀 다른 배치로 바꾸고 그 안에서 삶과 사유, 말과 행동이 종횡무진 흘러 다니게 한다.’

고미숙은 나아가 <열하일기> 를 두고,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이라고까지 했다. 유머 없는 <열하일기> 는 상상할 수 조차 없으며, 더 솔직히 말하면 <열하일기> 는 유머로 시작해 유머로 끝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에게 연암의 유머는 우스개가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적 편력이었다.

유머와 역설을 접하면서, 고미숙은 연암에게서 근대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지식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근대적 지식인이란 리얼리즘을 우선시하고 현실을 개혁하려 하며,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는 고정되고 정형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볼 때 연암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라는 근대적 이분법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다. 스스로 권력에서 멀어지고자 했고 지배 체제에 근본적 비판 의식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것과 직접 대결하기보다는 근본적인 사유를 바꾸려 했다.

그 점에서 연암의 사유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1925~1995)의 그것과 닮아 있다. 고미숙은 연암과 들뢰즈 모두가 안팎의 경계를 가로 지른 지식인으로 보았다. 모두 고정된 척도로 세상을 보지도, 선악을 가르지도 않는다. 척도가 견고해지면 그 자체가 도그마가 되고 파시즘이 될 수 있다고 고미숙은 부연한다.

연암과 들뢰즈에 대한 이 같은 긍정은, 지식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다. 사회 모순을 비틀고 비꼬는 것으로 지식인이 할 일을 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게 고미숙의 생각이다.

그는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넘어서는 삶을 표현하고 개선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며 그런 점에서 딱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연암이라고 말한다. 같은 이치로 연암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크스나 레닌 혹은 박정희 같은 사람은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 제도를 만들고 배치했지만 연암은 목표 자체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암에 대한 해석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 여부를 떠나,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부러워지는 게 하나 있다. 연암과 그 동료들이다. 홍대용, 정철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등으로 이뤄진 연암 그룹은 지금의 파고다 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부근에 모여 살면서 시문과 척독(尺牘ㆍ편지글)을 함께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며 세상 이치를 논했다.

연암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훨씬 떨어지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돼 그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극을 받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대로다. ‘아버지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연암에게 벗이란 존재는 또 다른 분신이었다.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이라고까지 쓸 정도였다.

고미숙은 “조선을 통틀어 이렇듯 폭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한 공부 모임, 친구 모임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세대적, 계층적 장벽을 넘는 연암의 공부는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이주 노동자, 농민, 재소자, 노인 등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와 우정을 나누며 만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함께 공부하며 지식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가 몸담고 있는 연구 공동체 ‘수유 + 너머’가 지향하는 방향을 넌지시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은 역사적 인물을 보는 신선하고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 점에서 돋보이는 책이다. 역사적 인물은 이래야 한다거나 근대적 지식인은 또 이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독자도 있었다. 연암을 개그 작가로 만들었다며 분노하기도 했다. 고미숙의 답변은 담담하다. “위대한 천재는 왜 유머가 있으면 안 되는가. 나는 <열하일기> 에서 유머를 읽었고, 그 순간 멀게만 느껴졌던 연암이 갑자기 친근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 고미숙 약력

-1960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 독문학과 학사, 국문학과 석ㆍ박사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저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들뢰즈와 문학기계> <비평기계> 등

■ '연암 - 다산' 극과 극의 두 거장이 비슷해 보이는 이유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 의 뒷부분에는 '연암과 다산-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라는 글을 실려 있다. 조선 후기의 두 거장, 연암과 다산의 비교다. 흔히 둘을 비슷한 계열로 간주하는 것과 달리, 고미숙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천재 혹은 거장이라는 점 말고는 유사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보자.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은 이질적인 글쓰기와 내용을 담은 패관잡기(稗官雜記)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다. 정조가 볼 때 패관잡기는 도발적 사유와 글쓰기, 섬세한 개인 감성의 묘사를 통해 독자를 슬픔에 잠기게 하고 작은 것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사대부의 존재 근거를 위협했다.

그런 점에서 문체반정은 문체와 국가 장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정조가 패관잡기의 배후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연암이었다. 또 관료의 경력을 쌓고 있던 다산은 패관잡서를 불사르고 중국에서 사들여오는 이를 중벌로 다스리라는 책문을 올렸다.

둘은 출신도 엇갈린다. 연암은 집권 세력인 노론의 일원이었고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에 속했다. 그런데도 연암은 과거 시험을 거부하고 권력에서 스스로 이탈했으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심부를 향해 들어갔다. 정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확산된 패관잡기를 문제시하면서도, 남인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서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연암과 다산은 글에서도 차이를 드러냈다. 연암은 기교파로 의미를 몇 겹으로 둘러치거나 다방면으로 분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반면 다산은 민중성, 리얼리즘, 전형성에서 돋보인다. 연암은 표현 형식의 전복에 몰두했고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했다. 연암은 대상과 소재, 주제 혹은 의미의 배치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쓰는 능동성을 추구했고 다산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세상의 경륜이라는 차원에서 시를 보았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비슷한 계열로 비쳐진 것은 중세적 체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의, 실학 담론을 잣대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미숙은 말한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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