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는 자신만만하게 시작할 수 있는 곡이 있는가 하면 첫 음부터 신경 쓰이는 곡이 있다. 오케스트라 곡으로 라벨의 '볼레로'는 어떨까? 이는 바르톡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과 더불어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긴장시킬 필요가 있는 지휘자들이 선호하는 곡이라 한다. 단원 중 제일 먼저, 그리고 오래, 제물이 되는 희생양은 작은북 주자이다.
그는 유명한 볼레로 리듬 패턴 두 마디를 피아니시모의 작디작은 소리로 시작하여 340마디의 전곡 중 169회, 그러니까 338마디를 여일하게 연주해야 한다.
● '볼레로' 작은북 주자의 고통
시종일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시작 소리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의 생명력은 길게 보장받을 수 있어, 어떤 이는 손톱이나 동전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피 말리는 극기 훈련이다.
시작이 까다로운 협주곡으로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가 으뜸이 아닐까? 일차 오케스트라가 주제 등을 선도한 후 협연자가 그 뒤를 따르는 일반 협주곡과 달리 이 작품은 협연자가 홀로 제1 주제를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주제가 소위 임팩트가 강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여리게)의 단순한 화음 반복을 그것도 돌체(부드럽게)로, 즉 선적으로 연주해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것이어서 연주자는 괴롭다.
그리하여 이를 의식한 나머지,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이 곡의 템포가 알레그로 모데라토임에도 불구하고 보다 느리게 연주하는 이도 있다.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는 쉼표와 더불어 간헐적으로 연주되는 저음의 솔음들만으로 시작한다. 침묵 속에서 등장한 솔음은 서서히 다단조 음계로 하강한다.
기교적으로는 어려운 것이 절대 아니지만 그 시작은 연주자를 매우 긴장시킨다. 그것이 단순 반복음이 아니라 분화하여 저 아래로 침잠하는 음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리흐테르는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피아노 앞에 어떠한 미동도 없이 앉아 속으로, 아주 천천히 서른까지 세었다고 회고했다.
이 걸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라고 한 그는 이러한 자기 연출을 통해 첫 음들을 단순한 솔음이 아닌 거대한 의미의 솔음으로 만들었다.
이들 시작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교적으로 어렵지 않으며, 음악적 특징도 강하지 않고, 큰 소리가 아니라는, 다시 말해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
즉 쉽고 단순하고 작은, 성격으로 말한다면 소극적이며 내성적이라고나 할까? 어찌되었든 연주자는 이를 통해 청자로 하여금 이후 연주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켜 끝날 때까지 자신을 우호적으로 지켜보게 해야 한다. 그것도 작품 전모를 이미 알고 있는 청중들로 하여금.
● 예술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과정
상대가 아는 사실을 새삼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나 쑥스러운 일인가? 그럼에도 연주자는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연주해야 하며 듣게 해야 한다. 아는 이야기를 청중이 또 듣기 원하는 것은 작품과 작곡가에 대한 연주가의 진지한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배운 대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석과 성찰이 있는, 한 인간의 진지한 생각을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을 통해 사람들이 상대를 이해하려 함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성호 작곡가ㆍ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