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대문구에 위치한 대우빌딩 6층 대우로지스틱스의 해운본부 운항팀. 직원들이 모두 해외 에이전트와 전화통화를 하느라 분주하다.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쓰는 언어도 각양각색이어서 사무실은 마치 외국어 경연장을 방불케 한다.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 한중현(27)씨는 3만8,000톤의 시멘트를 실은 배가 파나마 운하를 최대한 빨리 통과할 수 있도록 현지인과 조율 중이다. 하지만 아직 업무에 서툰데다 영어 대화 또한 만만치 않아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사 당시 한씨의 토익 점수는 600점대 후반. 입사 전까지 외국인과 대화를 나눠 본 적도 별로 없고, 구직자들에게 필수가 돼버린 어학연수도 간 적이 없다. 그런 그가 900점대의 토익 우등생들도 뚫기가 힘든 취업전선에서 성공을 거둔 건 ‘기적’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다고 다른 부분이 월등한 것도 아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을 나온 것을 제외하곤 학점은 3점대(4.5만점)에 일문과 졸업생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일본어 능력시험(JLPT) 자격증을 딴 게 전부다.
회계팀에서 근무중인 신입사원 이강엽(29)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찬밥 신세인 지방대 출신인데다 학점은 3점 초반대, 토익은 700점대 중반에 불과하다. 내세울 자격증도 없다. 이렇다 보니 취업 전 이력서를 낸 곳만 200여 사에 달할 정도다.
그럼 이 두 사람이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뭔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씨와 이씨는 “해외 유학파나 혀를 내두르는 스펙(학점ㆍ토익 점수 등)을 가진 지원자들이 줄줄이 떨어진 걸 보고 놀랐다”며 어학실력보다는 유연한 사고, 올바른 판단력을 갖춘 인재를 원하는 회사 분위기 덕인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이 회사의 입사전형 절차는 1차 서류전형을 거쳐 2차 상무면접, 3차 사장면접으로 이뤄진다. 면접도 영어면접이나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놓고 임원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신입사원 면접에서 나왔던 질문들은 ‘강남 집값의 원인과 해결책’, ‘한미 FTA’, ‘투기와 투자의 차이’, ‘이슬람권의 일부다처제’ 등이었다. 결국 현상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올바른 판단력을 인재 채용의 주요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쉴새 없이 돌출 변수가 튀어 나오는 해운업의 특성을 채용 단계에서부터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씨는 학교 친구들과 모의면접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해 본 게 주효 했다고 생각한다. 또 회사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정리하고 향후 전망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성을 보인 점도 가점 요인이었을 것이라는 자평이다.
한씨는 대학시절 철학 동아리 활동을 한 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철학 동아리에서 논리적 사고와 표현을 연습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현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또 맨주먹으로 중국에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등 진취적이고 자립심이 강한 모습도 어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씨는 “마라톤 토론을 하다 논리적 모순에 빠지는 지원자를 자주 봤다”며 “수많은 자격증으로 치장하기 보다는 평소에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면서 뚜렷한 세계관을 정립한 게 많은 도움이 됐다”고 귀띔했다.
회사측은 영어실력이나 해외유학 경험은 가점 요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또 사전조사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대부분의 대답을 회사와 연관짓는 등 사고가 경직된 지원자도 많다고 지적한다.
특히 자기소개서가 천편일률적이고, 현상을 해석하는 논리도 대동소이하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든다. 현상에만 집착하다 보니 이면에 내재돼 있는 함의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실례로 지난 2년 동안 이슬람권에서 일부다처제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 정확하게 얘기한 지원자가 한명도 없을 정도다.
인사 담당자인 배석표 부장은 “외국어 구사능력이 좋은 사람이 다른 일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는 글로벌 경쟁시대에서 유연한 사고와 올바른 판단력은 회사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을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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