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선에서 패배한 다음 해인 2003년 들어 한나라당에는 "뼈를 깎아 환골탈태 하자"는 다짐이 넘실댔다. 두 번의 대선패배 충격에 젖은 의원들은 너나 없이 변화를 외쳤다. "살아 남아서 다음 대선을 기약할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던 민정계 중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러나 딱 6개월이었다. 6월말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은 5, 6공에서 장관만 두 번을 한 최병렬 의원을 대표로 뽑았다. 대선패배 책임론에 휩싸여 있던 서청원 의원은 2위를 했다. 두 사람의 득표율이 무려 70%에 달했다. 한나라당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왜 그랬을까. 노무현 대통령 때문이다. 취임 직후부터 "대통령 못해먹겠다" 발언을 비롯한 온갖 말 실수로 지지율 하락을 자초했고, 여당인 민주당은 노 대통령 직계세력의 분당 움직임으로 늘 시끄러웠다. 여권 난맥상은 한나라당에서 "이대로 가도 상관 없겠다"는 생각을 키우는 토양이 됐다.
그래서 초반 한때 세대교체를 내건 강재섭 의원이 반짝했던 대표경선 레이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 질서를 상징하는 두 사람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요즘 한나라당에 이런 관성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대선에서 이기려면 정통 보수라는 당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며, 낯익은 보수 강경파 의원과 일부 외부 영입인사가 다른 소리를 내는 사람을 몰아붙인다. 대선후보 경선출마를 포기하라고 하고, 어떤 이에겐 당을 나가라고 한다. 그들의 보수신봉은 도무지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목청을 높이는 것은 당이 잘 나가기 때문이다. 세 명 대선주자의 지지율을 합치면 70%가 넘고, 당 지지도도 50%에 육박한다. 집권 비전이 보이니까, 여유가 있으니까 '우리끼리'를 외치며 뺄셈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보수 강화가 당과 대선주자의 위상제고에 도움이 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불어난 지지자의 대부분이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은 보수의 가치에 끌려 한나라당쪽으로 돌아선 게 아니다. 여권이 싫었기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색깔을 따지면 좌든 우든 경직된 이념에 거부감을 갖는 중도 세력이다.
지난해 말 본보와 동아시아연구소가 공동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36.3%로, 2002년 대선 당시에 비해 1.6%포인트밖에 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진보 이미지 훼손을 감안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증가율이다. 반면 중도를 자임한 국민은 비율(45.1%)과 증가율(6.5%포인트)에서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정권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보수 층이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선 한나라당 대선주자 지지자의 절반에 가까운 42%가 '지지하는 주자의 소속 정당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답했다. 이들은 전통적 한나라당 지지자가 아니다.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잡기 위한 방법이 보수 강화일수는 없다.
보수는 굳이 떠들지 않아도 한나라당의 숙명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들면 덫이 된다. 말을 조심하고 설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손학규, 원희룡이 아니다.
유성식 정치부장 직대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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