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 직원 윤영숙(34ㆍ평택 MC사업본부 생산팀) 씨는 이제 네 살 배기 아들을 매일 만날 수 있다. 아들은 아침마다 출근 길에 쉬지 않고 재롱을 부린다. 퇴근할 때 다시 만나면 엄마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느라 아들을 서울 시댁에 맡겨 놓고 주말에만 보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지난해 11월 회사 안에 어린이집이 생기면서 뒤늦게 발견한 작은 행복이다.
어린이집은 LG전자의 최신 히트작이다. 육아 전문업체에 위탁해 운영하는 만큼 시설과 교사진은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그저 아이를 맡아주는 곳이 아니다. 나이별로 차별화된 교육과정과 환경 친화적인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고, 아이들의 정서안정을 고려한 실내구조와 놀이시설을 갖췄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먹는 모든 음식을 유기농 재료로 만드는 것도 부모로서는 안심이다.
반면 비용은 일반 사립 어린이집의 60~70% 수준으로 저렴하다. 행여 교육비 외에 교재비나 특별활동비 등의 명목으로 수십 만원씩 추가로 부담할 필요도 없다. 가끔 퇴근시간이 늦어질 경우 쫓기듯 달려가 아이를 데려가야 하는 걱정도 덜었다. 부모의 퇴근 시간에 맞춰 밤늦게까지 아이를 돌봐주기 때문이다. 외부 보육시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LG전자의 평택 보육시설은 문을 열기 전부터 직원들은 물론, 인근 기업에서 입 소문을 탔다. 윤씨는 친구들로부터 어린이집이 부러워 회사를 옮기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윤씨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한다.
LG전자에 다니는 한 아들과 헤어질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에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떨어져 지냈다”며 “언제든 들러 볼 수 있는 좋은 시설에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경제적으로 부담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 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LG전자의 보육 시설을 이용하는 직원은 70명을 넘는다. 지난 달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부모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90% 이상이 ‘만족한다’고 답할 정도로 반응은 호의적이다. 회사측은 지난해 서울과 평택 사업장에 어린이집을 열었고, 올해에는 구미, 창원 등 전국의 사업장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가족이 경쟁력이다
어린이 집은 LG전자가 시동을 건 ‘가족친화 경영’의 일부분일 뿐이다. ‘가사불이(家社不二)’, 즉 화목한 가정은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고, 가정과 기업이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며 비전을 공유하는 동반자관계가 돼야 한다는 게 이 회사의 믿음이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가족친화 지수 조사에서 LG전자는 대기업으로는 드물게 국내 190개 기업 중 최상위권에 올랐다.
오세천 홍보부장은 “회사가 더 이상 가정생활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가정과 회사 모두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회사 경영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의 다채로운 가족친화 프로그램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디지털 여성대학’이다. 지방에 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직원 부인들이 관심분야에 대해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매주 2회, 총 8주간 무료로 진행하는 교양강좌다. 건강, 요리, 부동산, 재테크 등 중년 여성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는 주제를 망라해 이론교육과 실습을 병행한다.
최근 강좌를 수강한 정금자(58)씨는 “지역 문화센터에서 돈을 주고 듣는 강의보다 훨씬 깊이가 있고 수준이 높아 매번 많은 주부들이 몰렸다”며 “직원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이처럼 유익한 기회를 마련해준 회사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회사는 때론 작지만 깜찍한 이벤트로 직원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창원 DA사업본부에서는 매달 월급날이면 퇴근길 직원들에게 장미꽃을 한 송이씩 나눠준다.
비싸지는 않지만 선뜻 돈을 주고 사기에는 쑥스러운 선물이다. 이 날 만큼은 퇴근 시간도 오후5시로 앞당겨 직원들이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결혼한 지 십년이 넘었지만 꽃을 사준 적은 없었다”며 처음에는 멋쩍은 반응을 보이던 직원들도 이제는 오히려 “이번 달은 무슨 색 장미꽃이냐”며 먼저 찾아와 물어볼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한다.
스트레스는 일터에서 푼다.
스트레스는 가정생활을 깨뜨리는 방해꾼이다. 업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회사 안에서 적절하게 해소하고 밝은 얼굴로 퇴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회사의 책임이다.
때문에 LG전자에는 직원들이 부담 없이 모이는 독특한 시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유쾌한 시간이다. 부서별로 정한 변화관리자를 중심으로 온갖 아이디어를 내놓다 보면 어느새 직원들 사이에서는 웃음꽃이 피어난다.
지난해 사내에 비만 클리닉을 개설해 직원들의 살 빼기에 나선 것도 이 모임을 통해 나온 아이디어였다. 회사는 간호사, 비만관리사 등 전문가를 수시로 초청해 비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직원들은 걷기, 요가, 헬스 등 회사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했다.
LG전자는 또한 2005년부터 서울 우면동과 가산동 연구소에 심리상담실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는 물론 남몰래 겪는 개인적인 고민까지도 말끔히 해결해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어 매달 60여명이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전재영(35ㆍ여) 심리상담실장은 “미혼 연구원들이 많다 보니 경력관리, 이성관계, 집안문제 등으로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회사는 일만 하는 곳이라는 생각은 옛날 얘기”라고 말했다. LG전자의 가족친화경영의 초점은 기업과 직원의 사고를 바꾸는 데 있다. 가정은 더 이상 피로를 푸는 안식처가 아니고, 가장 중요한 일과를 시작하는 생활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k.co.kr
■ 직원자녀 위해 방학캠프 운영도/ "아빠 회사서 영어공부 너무 좋아요"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김고은(13) 양은 지난 달 3주간 영어캠프에 다녀왔다. 미국인 선생님과 하루종일 영어로 얘기하고, 온갖 상점이 늘어선 거리에서 달러를 주고 물건을 사기도 했다. 영어 대본을 외워가며 사람들 앞에서 연극을 공연하는가 하면, 부모님께 보낼 편지도 서툴지만 영어로 썼다. 장소가 LG전자 구미 연수원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느 영어마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LG전자는 1998년부터 매년 방학기간에 직원 자녀들을 위한 영어캠프를 마련하고 있다. 기업이 주최하는 행사로는 매우 이례적이다.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영어마을에 비해 시기도 한참 앞선다. 학생 수준에 따라 1~4주 과정으로 진행되며 초등학교 3학년~중학교 2학년 자녀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고은 양은 “학교에서는 영어를 제법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외국인과 부딪쳐보니 말문이 막혀 얼굴이 빨개졌다”며 “프로그램이 재미있고 다양해서 올 여름방학 때도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한번 다녀간 학생들은 다음 방학 때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 10년 동안 캠프가 계속되면서 다른 영어마을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경쟁력을 갖춘 셈이다. 2005년부터 연이어 캠프에 참가했다는 박세령(13) 군은 “방학 때 서울 근처 영어마을에 다녀온 친구들보다 내 영어실력이 더 나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며 “아빠가 근무하는 회사도 보고 영어도 익힐 수 있어 마음에 든다”고 웃었다.
회사에 들어와 처음 교육을 받았던 연수원에서 내 아이가 다시 교육을 받는 모습을 지켜본 직원들의 감회도 남다르다. 아들(10)을 캠프에 보냈던 김종호(39ㆍ구미 경영기획그룹) 차장은 “캠프에 다녀온 아이가 평소와 달리 아빠 회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길래 모처럼 마주앉아 회사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 부모로서는 한결 마음이 놓인다는 반응이다. 고은 양의 아버지 김태준(40ㆍ구미 DD사업본부)씨는 “딸을 연수는커녕, 영어마을에도 보내지 못해 늘 미안했다”며 “회사에서 여는 행사라 믿고 신청했는데 아이가 더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김광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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