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비(三田渡碑)는 3종의 문자로 새겨진 희한한 비석이다. 앞 왼쪽은 몽골문, 오른쪽은 만주문으로 되어 있고 뒤쪽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높이 4m쯤 되는 이 비석에는 청나라의 출병이유, 조선의 항복, 청 태종의 피해를 안 끼친 회군 등이 기록돼 있다. 이 비석은 치욕의 비(碑)로도 불린다.
조선이 군신(君臣)관계를 거부하자 1636년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끌고 침입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가다가 청군한테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인조는 눈물을 떨구며 태종에게 세 차례 큰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는, 굴욕적 항복의식을 치른다.
▦ 청의 강요로 세워진 이 비석에는 약소민족의 눈물 위에 역사왜곡이 덧칠해져 있다. 청 태종은 피해를 안 끼친 것이 아니라, 소현세자와 대표적 척화(斥和)대신 3명, 여자가 훨씬 많은 수만 명의 백성을 붙잡아갔다.
훗날 봉림대군이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가 설욕의 북벌정책을 편 효종이다. 뛰어난 문장 탓에 이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자손에게 '글을 배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글씨를 쓴 오준 역시 붓을 잡았던 오른손을 돌로 찍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 삼전도비는 현재 사적 101호다. 이 비석을 두고 '강요에 의해 세워졌고 부끄러운 역사와 왜곡된 사실을 담고 있는데 굳이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간혹 제기돼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비석이 주는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곤 했다. 열강 사이에 있는 한반도의 숙명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굴욕도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고 있으면 교훈이 된다.
▦ 굴욕보다는 교훈성이 더 크다고 판단되어 사적으로 지정된 바 있는 이 삼전도비에, 최근 붉은 페인트가 칠해졌다. 비석 앞 뒷면에 '철'자와 '거'자가 비석 반 만한 크기로 낙서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 지역 주민은 근래 이 비석이 재개발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철거를 요구해 왔다고 한다. 이런 야만스런 일이 식자층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송파구에서 발생했다는 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같은 반달리즘(문화 파괴행위)은 역사성과도 관련이 없다. 다만 개탄스러울 뿐이다.
박래부 논설위원실장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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