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제국의 침략 이겨낸 ‘아이티 혁명’시 엘 아르 제임스 지음ㆍ우태정 옮김 / 필맥ㆍ585쪽ㆍ1만6,000원
신화나 영웅 전설 또는 할리우드식 영화서사에 중독된 우리에게 최후의 극적 반전이 전제되지 않는 역사는 아무래도 덜 매력적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궁극적인 승리의 함성을 비수처럼 품고 신화나 영화 속 고난의 순간들을 즐기듯 견딘다. 하지만 역사는 영화가 아님을 알기에, 열망이 식은 뒤의 냉소를 알아버렸기에, 우리는 허망하게 스러질지 모를 짧은 영광의 시간에 선뜻 박수 치지 못한다.
다만 간신히,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푸스, 혹은 이카루스와 같은 패배한 신화 속 인물들에게, 또는 홍길동이나 체 게바라 등 좌절한 혁명의 영웅들에게, 그들이 선취했던 어떤 정신의 가치에 옹색하게 스스로를 투사하며 이 힘든 현재의 시간을 지탱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념의 시대였던 저 1980년대의 열정으로는 다시, 혁명사를 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또 하나의 색 바랜 혁명이 있다. 지구 저편 카리브 바다 위 산도밍고(현 아이티 공화국)라는 나라에서 18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일어난,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들의 반란인 아이티 혁명. 아프리카 해방과 이식된 아프리카인 아이티 정신의 복원을 열망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시 엘 아르 제임스의 책 <블랙 자코뱅> 은 제국 열강에 맞서 이겨, 1803년 현대 식민지로는 미국 다음으로 독립 국가 ‘아이티’를 건국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블랙>
”노예상들은 아프리카 기니의 여러 해안 지역을 헤집고 다녔다. 한 지역을 휩쓸고 나면 서쪽으로, 다음엔 남쪽으로 이동했다.”(29쪽) 이 위대한 승리 서사의 서막은 17~19세기 노예무역의 풍경, 서인도제도 노예 식민지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열린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 의 기억이 아슴한 우리에게, 그 풍경은 치 떨리게 참혹하다. 식량이 달리자 ‘거래 물품’ 가운데 몇을 죽여 “그 살점을 다른 노예들에게 먹”이는 노예선 선장의 이야기, 날카로운 채찍 소리, 참다가 뱉어 내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는 산도밍고 방문객들의 전언…. 뿌리>
노예 노동에 의한 커피ㆍ설탕 플랜테이션은 수 세기 서구 경제의 가장 든든한 토대였고,제국 각축의 동인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산도밍고는 프랑스 해외 무역 가운데 3분의 2를 감당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의 정신(자유ㆍ평등ㆍ박애)이 전해졌다. 2년 뒤인 1791년 시작된 ‘블랙 자코뱅’(흑인 노예들)의 반란은, 현지 백인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영국 스페인 침략군에 맞서 12년이라는 피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그 전쟁은 노예 해방 전쟁이었고, 반식민주의 전쟁이었으며, 인종 전쟁이었다.
책은 반전과 위기, 내분과 갈등의 과정을 샅샅이 훑는다. 그리고, 그 전쟁의 구심에 섰던 아이티의 검은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와’의 카리스마…. 아이티 혁명을 ‘색 바랜 혁명’이라고 한 것은, 책의 바깥 즉 독립국가 건설(1804년) 이후 오늘까지 이어져 온 아이티 200년의, 독재와 내전과 혼란과 가난의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혁명이 어떻게 20세기 카스트로의 혁명으로 이어졌는지, 또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정신으로 이어져가야 하는지 열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독립 아이티 공화국에 대한 제국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의 노골적 조롱과 은밀한 자기 정당화를 넘어 남은 열정을 쥐어짜 만나야 할 바로 그 정신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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